주제로 보는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1. 양반의 삶

3) 풍수지리에 심취한 양반들

조선 후기 자료 가운데 가장 흔히 보이는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것이다. 풍수에 따라 이장하거나 묘 자리를 쓰는 것인데 이는 전 사회 계층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이러한 풍조를 주도한 부류는 양반들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 양반들 사이에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고려 시기에도 유행하였지만 고려 중기 이후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유자 관료층을 중심으로 도참(圖讖) 내지 지리비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주자(朱子)의 경우 같은 기(氣)는 서로 감응한다는 ‘동기감응론’을 근거로 조상의 묘가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여 음택 풍수(陰宅風水)를 인정한 바 있지만 조선에서는 음택 풍수의 영향력은 서서히 약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풍수학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지적되면서 도참적 성격이 강한 고려의 지리서들이 상당 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조선적인 풍수관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음택 풍수는 근거가 약한 것으로 비판되고 성곽과 궁궐을 짓는 양기 풍수(陽氣風水)만이 인정받았는데 양기 풍수도 주술적인 성향은 배제되고 성리학적 자연관이 바탕을 이루었다. 길흉은 풍수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덕(德)에 좌우된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신비적 요소가 강한 음택 풍수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었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료 1-3-01〕

재조(再造) 후에 사대부들이 술사(術士)를 숭배하고 믿었다. 그래서 비록 멀고 오래된 조상의 무덤일지라도 다시 길지(吉地)를 택해서 이장하여 편안하게 두었으며, 부모의 묘에 이르러서는 비록 길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산이 좀 더 좋다고 하면 이장을 꺼리지 않아 두세 번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성(鰲城, 이항복)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자손이 잔열(殘劣)하면 매장하기가 실로 어려우며, 자손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면 안장하기가 또한 어렵다.”고 하였다. 풍자하는 뜻이 대개 상상이 된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재조, 즉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이장이 크게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고상안의 지적대로 임진란 후 풍수설에 따라 양반들이 묘지를 정하거나 이장한 기록은 셀 수 없이 많다. 임진란 이후 음택 풍수가 유행한 데는 선조광해군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미증유의 전란을 겪은 선조임진왜란이 도성 풍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한양을 재건하면서 풍수지리설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조는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한창 진행 중이던 경복궁 공사를 중지시킬 만큼 풍수에 관심이 많았다. 광해군의 경우는 선조의 영향도 있었지만 정통성의 약점에서 오는 불안감을 풍수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여 풍수에 맞추어 인경궁과 경덕궁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선조광해군이 활용했던 풍수는 신비적⋅주술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고 그러한 성격의 풍수설이 사대부들 사이에도 퍼지게 되었다.

심재(沈 , 1722~1784)가 쓴 『송천필담(松泉筆談)』에는 10대조의 묘 자리를 정하게 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의 10대조는 심순문(沈順門)인데 연산군 때 화를 입어 세상을 떠났다. 심순문의 아들 충혜공 심연원(沈連源)의 4형제가 관을 받들고 강화도를 향해 가다가 김포 땅을 지나가는데 수레의 끌채 가운데가 끓어져 운구를 멈추었다고 한다. 다음 자료는 그 다음 이야기이다.

〔사료 1-3-02〕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조금 전 스님 두 분이 지나가면서 서로 하는 말이 ‘길지가 여기인데 어찌하여 꼭 멀리 가서 구하려는가?’라고 했습니다.” 충혜공이 뒤따라가 애걸하자 노승이 처음에는 심하게 거절하며 뿌리쳤다. 사미승이 곁에서 극력 권하자 연민의 마음이 생긴 노승이 돌아와 마을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서둘러 장례지내라고 하고는 경계하여 말했다. “내가 출발해서 보강(寶江)을 건너 십 리쯤 갔을 것을 헤아려 무덤을 파시오.” 한 길쯤 땅을 파자 갑자기 커다란 벌이 돌 틈에서 나와 노승을 따라 날아가서 뒤통수를 쏘자 노승이 바로 죽었다고 한다. 묘혈을 정할 때 노승이 말하였다. “이곳은 크게 될 땅으로 당대에 아마 과거 급제가 일곱 번이 나올 것이고, 대대로 정승을 낼 것입니다.” 훗날 충혜공의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또 중시(重試)에 급제한 것이 세 번이니, 과거 급제한 것이 모두 일곱 번이었다.

심재(沈 , 1722~1784), 『송천필담(松泉筆談)』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심재의 집안에서는 사실처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심재의 집안에서는 통진에 계속해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의 풍수설이 유행한 것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줄 없이 자신의 실력으로만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관직에 진출하더라도 능력만으로 정상적인 승진이 어려웠으므로 무엇인가 다른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풍수는 비합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조상을 좋은 땅에 편하게 모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적인 효 의식과 부합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양반들 사이에 풍수설은 크게 유행하였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풍수가 유행하면서 명당자리를 잘 가리는 것으로 유명한 이들도 등장하였다.

〔사료 1-3-03〕

근래 정하규(鄭夏圭)라는 사람이 점을 잘 쳐서 이름을 얻었는데 특히 명당자리를 가리는 점을 더 잘 쳤다. 점괘를 뽑은 뒤 그 산의 형국이나 안대(案對)를 논하면 마치 현장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그 때문에 그가 길흉을 판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돈복(辛敦復, 1692~1779), 『학산한언(鶴山閑言)』

사대부들 사이에 이장이 유행하자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예장(禮葬)1)으로 치르는 장사라도 무덤을 옮겨서 하면 예장을 허락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풍수설을 비판하는 논의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설은 더욱 확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풍수설이 온통 풍속을 이루었다고 풍수설의 유행상을 언급한 바 있다. 풍수설이 유행하자 정약용이 「풍수론(風水論)」을 지어 당시 만연해 있던 음택 풍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밖에 여러 실학자들도 풍수의 신비주의적 요소를 문제 삼는 등 풍수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으로 풍수설이 확산되어 가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지내는 장사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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