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이야기 고려사3. 고려 중기 정치 이념의 분화와 발전

4) 의종은 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추구했을까

1136년(인종 14) 2월 묘청의 난이 진압되면서, 음양 도참⋅불교⋅도교 사상을 지닌 묘청서경 세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를 시도했던 인종의 정치는 실패로 끝납니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의 유교 관료 집단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유교 정치 이념이 다시 정치 사상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사정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료 3-4-01〕 유교 정치 이념의 재정비

1) “김부식과 최진(崔溱) 등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김부식에게 명하여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유표(遺表)와 훈검문(訓儉文)을 읽게 하고 한참 동안 그를 칭찬하였다. 또한 ‘사마광의 충의가 이와 같은데, 당시 사람들이 간당(姦黨)이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다. 김부식은, ‘왕안석(王安石) 무리들과 서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요, 실은 죄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대하여 왕은, ‘송나라가 망한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17년 3월)

2)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김부식이 편찬한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사(三國史)』를 올렸다. 왕이 내시 최산보(崔山甫)를 보내어 그 집에 가서 칭찬하여 유고(諭告)하고 꽃과 술을 후하게 내렸다.”(『고려사절요』 권 10 인종 23년 12월)

사료 1)은 묘청의 난이 진압되고 3년이 지난 1139년(인종 17)에 인종김부식이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인종김부식은 중국 송나라 역사에서 부국 강병론에 입각하여 변법을 시도한 왕안석의 신법보다는 구법(舊法), 즉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던 사마광을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왕안석의 변법이 송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불과 10여 년 전, 서경 세력과 손을 잡고서 서경 천도와 칭제 건원, 금나라 정벌 등 그야말로 변법에 가까운 정책을 시도했던 자신의 정책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신법과 같은 급격한 변화보다는 기존 질서인 구법을 존숭하는,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한 정치로 회귀하였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료 2)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부식은 벼슬에서 물러난 1142년부터 편찬에 착수하여, 3년 만인 1145년에 『삼국사기』를 완성합니다.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과거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한 역사서입니다. 『삼국사기』의 편찬은 이자겸과 묘청의 난으로 초래된 정치와 사상의 혼란을 극복하고,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통하여 왕과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삼국사기(옥산 서원본)
출처: 문화재청

삼국사기』가 편찬된 이듬해 인종이 서거하고, 그의 장남인 의종이 즉위합니다. 의종의 즉위는 차남을 왕위 계승자로 내세우려는 외척의 반대로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김부식을 비롯한 유교 관료 집단의 적극적인 지지로 의종은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의 기록이 그런 사정을 잘 알려 줍니다.

〔사료 3-4-02〕 『고려사』 권 98 정습명 열전

“정습명(鄭襲明)이 오래 간직(諫職)에 있으면서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다. 인종이 그의 재주와 국량을 중하게 여겨, 동궁(東宮; *의종)의 스승이 되게 하였다. (인종이) 병이 들자 의종에게, ‘나라를 다스림에는 마땅히 정습명의 말을 따라야 한다.’라고 했다. 따라서 (의종은) 정습명의 요구를 함부로 외면할 수 없었다.”

위의 기록과 같이 의종은 즉위 후 자신의 즉위를 지지한 김부식, 정습명 등의 유교 관료 집단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의종은 즉위 초 과거 제도를 강화하고 『상정고금예(詳定古今禮)』를 편찬하여 유교 의례(儀禮)를 정비하는 등,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한 제도 정비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에 정치를 주도했던 문신 관료 집단이 행한 유교 지향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된 것이며, 그들의 도움으로 즉위한 의종 역시 처음부터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종의 정치적 지향은 유교 관료 집단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습니다. 1151년(의종 5) 김부식과 함께 자신을 보필했던 정습명이 죽자, 의종은 유교 관료 집단의 요구를 외면하고 새로운 정치를 시도합니다. 즉 의종은 유교 관료 집단에 의존하는 정국 운영으로는 왕실을 중흥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정국을 자신의 구상대로 이끌어가기 위해 의종은 새로운 정치 세력과 손을 잡습니다. 다음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사료 3-4-03〕 의종의 정치에 대한 사관의 평가

1)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하기를, ‘군주와 신하는 머리와 팔다리처럼 서로 한 몸으로 의존한다. 옛날의 어질고 슬기로운 임금들은 문무를 좌우의 손과 같이 여겨 피차와 경중을 두지 않아, 임금은 위에서 밝고 신하는 조정에서 화합하여 반란이 일어날 수 없었다. 의종 초기의 정치는 규모가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진실로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얻어 보좌하였다면 반드시 후세에서 찬양할 만한 선정(善政)을 시행하였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이 좌우에 나열되어,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없애고, 정치에 부지런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에 돌렸으며, 풍월을 읊는 것으로써 신하와의 정치에 대한 의논을 대신하였다. 이로써 점차 무인의 노여움이 쌓여 화가 장차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 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2) “사신(史臣) 김양경(金良鏡)이 말하기를 왕이 태자로 있을 때 인종이 임종에 임하여, ‘나라를 다스리려면 오로지 정습명의 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했다. 정습명은 본래 정직하고 막중한 부탁을 받아 힘을 다하여 충언을 진달하고 왕의 과실과 부족한 점을 도왔다. (그러나) 김존중(金存中)⋅정함(鄭諴) 등이 밤낮으로 참소하여 제거하고, 왕이 김존중으로 정습명을 대신하게 하니 이로부터 아첨하는 무리들은 날로 진출하고, 충성 있고 직언하는 사람들은 날로 물러나게 되었다. 왕은 더욱 방종하여 향락에 빠져 놀이를 즐기기를 절제 없이 하였다.”(『고려사절요』 권 11 의종 24년 9월 사평(史評))

사료 1)에서 무신 정권기의 유교 사가(史家)인 유승단은 이상적인 정치는 국왕과 (유교) 관료 집단이 각각 머리와 팔다리처럼 한 몸이 되어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주문했던 사평(史評)입니다. 의종은 초기 정치에서 잠깐 그러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이후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무신 정변을 초래했다고 했습니다. 사료 2)는 김존중⋅정함의 모함으로 정습명이 제거됨으로써 아첨하는 무리들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치를 그르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역시 유교 사가의 관점에서 의종의 정치를 평가한 것입니다.

의종은 재위 중반 이후 유교 정치 이념 대신 음양 도참 사상과 불교, 선풍(仙風)을 중시하는 정치 이념을 통하여 왕실과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를 시도합니다.

〔사료 3-4-04〕 『고려사절요』 권 11 의종 24년 9월 사평(史評)

“사신(史臣) 김양경(金良鏡)이 말하기를, 전 왕(의종)이 불법(佛法)을 높이 받들어 귀신을 공경하고 믿으며 따로 경색(經色)⋅위의색(威儀色)⋅기은색(祈恩色)⋅대초색(大醮色)을 세우고, 재를 올리며 기도하는 비용을 한없이 징수하여 구구하게 부처와 귀신을 섬겼다. 이복기⋅임종식⋅한뇌와 같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좌우로 삼고, 정함⋅왕광취⋅백자단과 같은 아첨하고 말 잘하는 소인을 환관으로 삼았으며, 영의⋅김자기와 같은 음흉한 자를 술사(術士)로 삼았다. 총애하던 폐첩 무비(無比)가 안에서 일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왕의 환심을 사고 그 마음을 유도하고자 서로 요사스러운 아첨을 일삼아 달콤하고 교묘한 말이 분분히 일어나고 바른말이 끊어졌다. 변란이 서울 안에서 일어났지만 마침내 이를 깨닫지 못했다.”

위의 글에 따르면 의종은 불교와 음양 사상 등을 높이 받들고, 이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낭비했습니다. 또한 술사와 환관 등을 측근으로 삼은 까닭에 정치를 그르쳤다고 했습니다. 유교 사관의 눈으로 의종의 정치를 평가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과거 묘청과 결합하여 지향했던 인종의 정치 이념이 의종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교 정치 이념과는 반대 지점에 있는 불교와 도교, 음양 도참 사상이 여전히 당시 정치 사상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료 3-4-05〕 『고려사절요』 권 11 의종 11년 1월

“정월 초하루 무진에 바람이 건방(乾方)으로부터 불자 태사(太史)가, ‘나라에 우환이 있을 징조입니다.’ 하자 왕이 두려워하였다. 복자(卜者)인 내시 영의(榮儀)가 이를 보고 재앙을 제거하는 제사를 지내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아뢰자, 왕이 이를 믿고 영통사와 경천사 등 5개 사찰에 명하여, 그로부터 연말까지 항상 불사를 베풀어 빌었다. (중략) (영의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국가 기업의 멀고 가까운 것과 왕의 수명의 길고 짧은 것이, 다만 기도의 부지런함과 태만함, 순행의 정도가 어떠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이에 매우 미혹되었다. 또한 영의가, ‘대궐 동쪽에 새로 익궐(翼闕)을 이룩하면, 기업(基業)을 연장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아우 익양후(翼陽侯)의 집을 탈취하여 별궁을 창건하였다.”

위의 기록과 같이 의종은 1157년(의종 11) 유교 관료 집단 대신 영의와 같은 불교, 음양과 풍수지리에 밝은 술사(術士)들을 측근으로 삼아 각종 불사를 통하여 왕조의 기업을 연장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유교 정치 이념에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호의적이지도 않은, 반유교 성향의 인물들입니다.

〔사료 3-4-06〕 『고려사절요』 권 11 의종 12년

“(8월) 태사감후(太史監候) 유원도(劉元度)가, ‘백주(白州; *황해 백천) 토산(兔山)의 반월강(半月岡)은 실로 우리나라가 중흥(重興)할 땅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북로(北虜)를 정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평장사 최윤의(崔允儀)를 보내어 풍수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은, ‘산세가 모여들고[山朝] 물이 순하게 흘러 궁궐을 세울 만합니다.’라고 했다. 9월, 백주에 별궁을 창건하였다. (중략) 대궐의 이름을 중흥궐(重興闕), 전(殿)을 대화전(大化殿)이라 하여 현판을 달았다.”

의종은 1158년(의종 12), 왕조의 중흥을 위하여 풍수도참 사상에 따라 개경 인근의 백주에 중흥궐을 창건합니다. 그 이전인 1154년(인종 8) 9월에는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합니다. ‘중흥’이라는 명칭에는 왕조의 중흥을 꾀하려는 의종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중흥궐의 창건은 인종서경에 대화궁을 창건했던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의종은 중흥궐 창건 외에도 문종이 창건했던 장원정에도 여러 차례 순행합니다. 또한 의종은 재위 말년에도 서경에 행차합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는 교서를 반포합니다.

〔사료 3-4-07〕 의종의 서경 행차와 그 정치적 배경

1) “무자(戊子)에 관풍전(觀風殿)에 거동하여 하교하기를, ‘짐이 듣건대 호경(鎬京; *서경)은 만세에 걸쳐 쇠하지 않는 땅이다. 뒷날 국왕이 이곳에 와서 새로운 교서를 반포하면 국풍(國風)이 청명하고 백성이 편안하다고 했다. 짐이 즉위한 이후 이곳에 올 여가가 없었다가, 일관(日官)의 요청에 따라 여기에 와서, 옛 것을 고치고 새롭게 혁신하여, 왕의 교화를 다시 부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옛 성인이 권하고 경계하신 유훈(*훈요십조)에 따라 지금의 폐단을 고치고자 신령(新令)을 반포한다.’라고 했다.”(『고려사』 권 18 의종 22년 3월)

2) “서도(西都)는 곧 조종(祖宗)이 순어(巡御)하던 땅이다. 을묘의 난(*묘청의 난)을 겪은 뒤로 국사가 많은 일로 여러 해 동안 순어하지 못하였다. 이제 오래 젖어 온 구속을 함께 유신(維新)하고, 또 왕조의 기업(基業)을 보호하고 연장하기 위하여 이곳에 행차하였다.”(『고려사』 권 18 의종 22년 4월)

사료 1)에서 의종은 1168년(의종 22) 서경에 행차하여 위의 교서를 반포하면서, 새로운 혁신 정치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인용하지 않았지만, 의종은 이 교서의 뒷부분에서 새로운 정치를 위하여 음양 사상을 받들어 따를 것, 불사(佛事)와 삼보(三寶; *佛⋅法⋅僧)를 존숭할 것, 선풍(仙風)과 팔관회 행사를 숭상하라고 했습니다. 의종은 이러한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삼아 민생을 구휼하는 등 혁신 정치를 시도하려 했습니다. 사료 2)에서 서경 행차와 교서 반포는 궁극적으로 왕조의 기업을 연장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서경이 길지(吉地)라는 태조 이래 전해 내려오던 풍수도참 사상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여 줍니다.

불교, 도교 및 음양 도참 사상에 의존하여 왕실의 중흥과 왕권의 회복을 꾀했던 의종의 정치는 기득권층으로 보수화한 유교 관료 집단과 외척 세력의 반대로 난관에 봉착합니다. 또한 술사와 환관 등 측근 세력에 의존하던 의종의 정국 운영 역시 유교 관료 집단의 외면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정치 세력 간의 조화와 균형을 잃으면서 정국은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였고, 서경에서 교서를 반포한 지 불과 2년 만인 1170년(의종 24), 마침내 미증유의 무신 정변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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