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3. 평민의 삶

2)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법

조선 시대 백성들은 다양한 방식의 삶을 살았다. 일반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농민들이 안정된 생활을 꾸리기 위해서는 적정 규모의 토지가 있어야 하는데 대개는 그렇지 못하였다. 1797년(정조 21) 면천 현감으로 재직하던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지금의 당진시(唐津市)에 속한 면천 지역의 상황에 대해 자기 땅을 가진 농민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고, 소작 농민들은 이것저것 세금을 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1년 농사가 소금 값도 안 된다”는 농민의 속언이 그대로 들어맞는 상황이라고 전한 바 있다. 박지원은 이런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잘사는 사람들이 농지를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자급 가능한 자영농은 그리 많지 않았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농민들은 상인으로 전환하였다. 장시가 크게 성행하였고 자연히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옥(李鈺, 1760~1812)은 서울은 온갖 장인과 장사꾼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상품으로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많은 점포에 쌓여 있어 점포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바둑알처럼 깔렸다고 설명하였다. 장시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사료 3-2-01〕

많은 눈들이 정신없이 움직여서 오직 이익을 엿보고 많은 입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오직 이익을 도모한다. 어떤 사람은 팔고 어떤 사람은 사고 또 어떤 사람은 거간 붙이며, 해가 뜨면 모였다가 해가 지면 파한다. 시장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어깨와 등이 부딪힐 정도이고 서 있는 사람은 관이 바를 수가 없다. 간교하고 잗단1) 소인배들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고 참새가 숲에 모이듯 출몰하여 그 사이에서 의심하고 눈을 번뜩인다. 심한 자는 전대를 빼앗아 다른 사람의 돈을 갈취하며, 그 다음은 가짜 물건을 속여 파는 것을 이익으로 삼는다.

이옥(李鈺, 1760~1812), 「시간기(市奸記)」

장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양반 이옥의 눈에 장시는 이익을 얻기 위한 간교한 술책이 난무하는 곳이었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장이었다.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시장
조선 후기 장시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소장 :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어떤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광산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정부는 세를 받는 대신 광산의 채굴을 허락하였다. 광산이 많은 북쪽 지역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운이 좋으면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광산 채굴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은 은광(銀鑛)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료 3-2-02〕

강계에는 은광이 많이 있었으므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산꼭대기까지 집을 짓고 살았다. 이들은 모두 놀고먹는 무뢰배로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맞대고 시선을 모아 광산 입구를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광산 입구에는 철통같이 지키는 자가 있어 침입할 틈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기웃거리던 자들이 즉시 몸을 던져 들어갔다. 그 안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자칫하면 수많은 돌무더기에 파묻힐 수 있었는데도 이들은 죽거나 다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굴속에 들어온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횃불을 따라 구불구불 가다 보면 은을 캐는 곳에 이르는데, 그곳에는 은덩이가 산처럼 쌓여 있어서 망치로 살짝만 쳐도 은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러면 무뢰배는 냉큼 은을 끌어안고 엎드려 죽어도 놓지 않고 감독관의 욕과 매질을 엿처럼 달게 여기니, 감독관도 떠밀어 내보낼 뿐 어찌할 수 없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최고의 수익의 거둘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잡기고담(雜記古談)』의 저자 임매(任邁, 1711~1779)는 방납(防納)이라고 이야기한다. 『잡기고담』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자.

〔사료 3-2-03〕

서울의 백성들 가운데 지방에서 바칠 공물을 대납하고 해당 고을에서 그 값을 받아들이는 것이 업인 자들이 있다. 그들이 받는 공물 값은 많으면 쌀로 몇 백 섬이요, 적어도 백 섬 가까이는 되었다. 부자들은 몇 가지 종류의 공물 대납을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대납권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서로 팔고사기도 하니 소작료 받아먹는 논밭이나 마찬가지다. 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 공물을 바치게 하고 고을에서 받은 값을 본 주인에게 나누어 주는 일도 있으니 땅을 소작 주고 세를 거두는 것과 같다. 이것을 ‘분실(分實)’이라고 하는데 서울 백성들의 생업 가운데서도 가장 이득이 많은 일이다.

임매(任邁, 1711~1779), 『잡기고담(雜記古談)』

방납권을 가진 사람은 방납을 통해 많은 이익을 거두었으며 방납권은 하나의 권리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방납이 일반 백성들에게 끼치는 부담만큼 방납을 담당하는 이들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방납이 일반 백성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사업이라면 가장 밑바닥의 일은 매품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 시대의 관리들은 태형이나 장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경우 매를 맞는 대신 속전(贖錢)2)을 내는 것이 관례였다.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도 나이가 너무 많아 매를 맞을 수 없는 사람들은 속전으로 매를 대신할 수 있었다. 속전으로 형벌을 대신하자 매를 대신 맞고 돈을 챙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흥부전」에도 흥부가 돈을 벌기 위해 매품을 팔려고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만큼 매품은 당시 널리 행해지고 있었으며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매품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료 3-2-04〕

형조에서는 곤장 백 대에 속전(贖錢)이 일곱 꿰미였고, 대신 곤장 맞는 자도 일곱 꿰미를 받았다. 대신 곤장 맞는 것으로 생활하는 어떤 자가 한여름에 하루 백 대씩 두 차례나 볼기 품을 팔고는 돈꿰미를 차고 으스대며 집에 돌아왔다. 그의 아내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백 대 맞을 돈을 또 받아 놓았소.” 남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오늘은 너무 지쳤어. 세 번은 안 돼.”하였다. 아내는 탄식하며, “당신이 잠시만 힘들면 우리는 며칠을 배불리 먹으며 잘 지낼 수 있고 게다가 이미 돈까지 받아 놓았는데, 못 맞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하고는 곧 주안상을 차려 와서 남편에게 먹였다. 남편은 취기가 돌자 볼기짝을 쓰다듬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그리고는 형조에 가서 곤장을 맞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성대중은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일화로 거론하였지만 매를 대신 맞고 버는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조선 시대 백성들의 삶은 다양하였다. 그런데 자료 가운데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사치 풍조가 유행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제시해 보기로 한다.

〔사료 3-2-05〕

① 사치의 폐단은 근래에 더욱 심해져 일반 백성들도 명주실로 만든 것이 아니면 쓰지 않고 무늬 있는 비단이 아니면 입지 않는다. 이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여 비단 1필 값이 베 5~6필 갓과 비슷하고 명주실로 만든 삿 값은 국운이 강성했던 시대의 3배나 되니 이것이 재물이 마르고 백성이 곤궁해지게 된 근본 원인이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② 근래에 와서 정부의 고관 대부의 집은 물론이요, 시정의 천민들까지도 서로 다투어 아름답고 사치한 것을 숭상하여 동원(東園)의 비기(秘器)보다 더 좋은 것으로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다가는 장차 금으로 관을 만들려 할 것이니 개탄스럽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양반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도 화려한 옷을 입고, 초상이 나면 동원의 비기 즉 왕실에서 쓰는 관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사치 풍조가 유행한 것은 일반인들 가운데도 소비 능력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였고 그들이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하는 짓이 잘고 인색하다
2)벌금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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