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이야기 고려사2. 고려 중기 정치 이념의 성립

1) 문치주의 정치 이념; 고려 왕조 전성기의 길을 열다

예종(1106-1122년 재위)인종(1123-1146년 재위)이 재위했던 12세기를 고려 왕조의 전성기로 이해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무렵 송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물이 대거 수용되면서 유학의 발달, 교육의 장려, 상감청자의 등장 등 문벌 귀족 중심의 사상과 문화가 크게 꽃을 피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음의 글은 그와는 다른 견해를 보여 줍니다.

〔사료 2-1-01〕 『고려사』 권 9 문종 37년 이제현의 문종(文宗) 사찬

현종덕종정종문종은 아비가 일어나자 아들이 그를 이었으며, 형이 죽자 동생이 왕위를 잇기를 거의 80년이나 되었으니, (고려 왕조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중략) 문종은 불필요한 관원을 줄이고 일을 간소하게 하였으며, 비용을 줄여 나라가 부유해졌다. 큰 창고의 곡식이 썩어 문드러졌으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태평성대라 불렀다. 송나라는 매번 (고려를) 포상하는 명을 내렸고, 거란은 해마다 경사스럽고 축복하는 예를 닦았다. 동쪽 왜인(倭人)은 바다를 건너와 진기한 보물을 바쳤고, 북쪽 맥인(貊人)은 국경으로 와서 삶의 터전을 얻어 백성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임완(林完)은 문종을 고려의 어질고 거룩한 군주(賢聖之君)라 하였다.”

고려 말의 역사가 이제현(李齊賢)현종(1009-1031년 재위)덕종(1031-1034년 재위)정종(1034-1046년 재위)문종(1046-1083년 재위)으로 이어지는 약 80년 간이 고려 왕조의 전성기라 했습니다. 그 가운데 문종 때를 가장 번성한 태평성대라 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대외 관계를 전성기의 이유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전성기를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당시 국왕을 비롯한 지배 세력이 정치를 어떻게 운영했기에 전성기로 이끌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장 먼저 듭니다. 이 글이 추구하는 주제이기도 한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 정치 사상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지요.

익재 이제현 영정
출처: 문화재청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치주의(文治主義) 정치 이념이 이 무렵 대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문치주의는 무력을 배경으로 정치를 하는 무단(武斷) 정치와는 달리, 유교적인 교화와 법령에 바탕을 둔 정치 이념입니다. 대체로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중국 한나라 때부터 이러한 정치 이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국왕 주도의 전제(專制) 정치와도 다른 것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말합니다. 11세기의 고려 왕조기에 나타난 문치주의 정치 이념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고려 초기 이래 화풍(華風)이 꾸준히 수용되면서, 그 결실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조짐은 성종 때(982년)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유명한 상소인 ‘시무 28조’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료 2-1-02〕 『고려사』 권 93 최승로 열전

“불교를 받드는 일은 수신(修身)을 하는 근본이며, 유교를 받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수신은 내생(來生: 다음의 삶)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지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지극히 가까운 것이며, 내생은 지극히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는 일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최승로는 고려 왕조기의 다양한 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사상인 유교와 불교의 역할에 대해 매우 재미있는 정의를 내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닦는 수신의 역할은 불교, 나라를 통치하는 역할은 유교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종에게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건의했던 것입니다.

문치주의 이념은 이러한 이념을 가진 정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둘러싼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 끝에, 문치주의 이념을 지닌 정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착하게 됩니다.

고려 말의 역사가 이제현은 이러한 정국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료 2-1-03〕 『고려사』 권 5 정종 12년; 이제현의 정종에 대한 사평(史評)

“거란은 탐욕스럽고 사나워 신의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태조가 그들을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대연림(大延琳)의 난(*발해의 후신인 흥료국(興遼國)을 건설한 일)을 계기로 구호(舊好)를 버리는 것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니다. 현종은 어려운 때에 반정(反正)하매 미처 겨를이 없었다. 덕종은 어리기 때문에 더욱 전쟁을 경계하여야 했다. 왕가도(王可道)가 (거란과) 화친의 의리를 끊자고 주장하는 것은, 황보유의(皇甫兪義)가 (거란과) 화친을 유지하면서 백성을 쉬게 하자는 주장만 못한 것이다. 정종이 왕위를 계승한 지 3년 만에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사신으로 가고, 4년에 거란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왔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다시 화평을 유지했다.”

이제현정종 때 고려와 거란이 다시 외교 관계를 재개하면서 화평을 유지한 정책이 옳았다고 했습니다. 이 결정이 있기까지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둘러싸고 고려 조정 내부는 상당한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위의 글에서 덕종 때 거란에 대해 왕가도의 단교론(斷交論; *이제현은 이를 의절론(義絶論)이라 함)과 황보유의의 화친론(和親論; *이제현은 이를 계호 식민론(繼好息民論)이라 함)이 팽팽히 대립했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종 3년(1037) 거란과의 외교 재개로 결국 황보유의의 화친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문치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러한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고려와 거란이 다시 외교를 재개하게 된 사정과 화친론을 주도했던 정치 세력의 실체입니다.

현종 11년(1020) 거란과의 전쟁은 끝났으나, 현종 원년(1010)의 거란 침입 때 사신으로 거란에 갔다가 억류되었던 이예균(李禮均)과 왕동영(王同潁) 등 고려 사신의 귀환과, 현종 6년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의 고려 영토에 설치했던 성의 철거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두 나라 간의 현안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현종 20년(1029) 발해 후손 대연림(大延琳)이 거란에 반란을 일으켜 흥료국(興遼國)을 건설하고, 1031년(덕종 원년) 거란의 성종이 죽자 부마 필제(匹梯)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거란이 불안한 정세를 보이자, 고려는 이를 이용하여 거란 성종의 장례식과 흥종의 즉위식에 사신을 보내 현안의 해결을 요구했습니다. 귀국한 사신의 보고 결과, 고려 조정은 다음과 같이 거란과의 단교를 둘러싸고 팽팽한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사료 2-1-04〕 『고려사절요』 권 3 덕종 원년 11월

“김행공(金行恭)이 귀국하여 거란이 고려의 요구(*억류 사신 귀국, 축성 철거)를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평장사 서눌(徐訥) 등 29명은 사신 파견을 중단하자고 했다. 중추사 황보유의 등 33인은 거란과 단교하는 폐해는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거란과의 관계를 유지하여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덕종은 서눌과 왕가도의 의견을 따라,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거란의 죽은 성종 연호만 사용하기로 했다.”

이제현이 언급했듯이 단교를 주장하는 이른바 의절론이라는 강경론과, 화친을 주장하는 계호 식민론이 각각 29명과 33명으로 의견이 서로 팽팽하게 갈려 있었습니다. 덕종은 강경론을 수용하고 재위 중 사신 파견은 물론, 거란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는 등 외교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결국 덕종 때는 대거란 강경론이 정국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덕종의 사후인 정종 원년(1035)에 거란이 먼저 외교 관계의 재개를 요구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정종 3년, 고려와 거란은 고려 영토에 설치한 성은 철거하지 않되, 이곳에서 고려인들이 농경을 하는 것은 허용한다는 타협 끝에 외교 관계를 재개합니다. 억류된 사신의 귀국 문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사신이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주목되는 것은 고려가 그 동안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은 것은 전왕인 덕종의 결정이라고 하여, 현재의 국왕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입장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점입니다. 왜 정종현종 이래 거란과 단교까지 불사하며 집착했던 고려 영토 안에 있는 거란의 성 철거를 포기하면서까지 거란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을까요? 이는 정종 개인의 결정이라기보다는 당시 정국 운영의 변화, 즉 정치 주도 세력의 변화 때문입니다. 대거란 강경론 대신 온건론을 펼치는 정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으며, 문치주의 정치 이념은 바로 이러한 온건론의 정치 이념이었던 것입니다.

거란과의 전쟁

당시 온건론을 펼쳤던 정치 세력, 즉 문치주의 이념을 가진 세력은 현종의 즉위 공신인 채충순⋅최항⋅황보유의, 거란의 침입 시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 수행했던 채충순⋅장연우, 현종 5년(1014) 경군(京軍)의 영업전을 축소하여 관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다가 무신들의 반발로 최질⋅김훈의 난을 유발했던 황보유의⋅장연우, 거란과의 전란 후 소실(燒失)된 『7대실록』을 편찬하고 유교적인 각종 시책으로 문풍(文風)을 진작했던 황주량⋅최제안⋅최충, 지방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군현제를 개편했던 최사위, 발해 후손 대연림이 흥료국을 건설한 후 고려에게 거란 협공을 제의할 때 반대했던 최사위⋅채충순 등이 대거란 온건론을 펼치면서 거란과의 외교 관계 재개를 주도했던 정치 세력입니다.

이들은 현종을 옹립하면서 무장 세력이나 지방 세력의 발호를 막았고, 지방 제도를 확립하는 등 왕권의 확립과 유지, 안정화에 기여했으며, 관료 제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무장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경군 영업전을 축소하여 일반 관료의 재정 기반을 마련했으며, 문풍(文風)을 고취하고 국가의 역사서를 편찬했습니다. 즉 이들은 궁극적으로 내치(內治)의 안정과 문치주의의 확립을 정국 운영의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목종 때 김치양과 강조 등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면서 왕권의 불안정과 거란의 침입을 초래했던 쓰라린 경험을 체험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내치의 안정, 즉 왕권의 안정은 대외 관계의 안정과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들이 대외 관계에서 강경론보다는 화친론을 견지한 것은 내치의 안정, 즉 문치주의의 확립이라는 정국 운영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치주의 이념의 정치 세력은 현종 때 역사서 편찬과 지방 제도 개편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내치를 안정시켰으며, 각종 유교 시책을 통해 문풍을 진작하는 등 거란과의 전란 이후의 전후 복구 사업과 국내 지배 질서를 구축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덕종이 즉위하면서 대거란 강경론을 내세우던 정치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덕종과 그 후견인이었던 왕가도의 죽음으로 강경론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거란과의 관계 회복을 주도했던 정종 대 이후 화친론은 고려 시대 정국 운영론의 대세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세력은 뒷날 예종 때 여진에게 9성을 되돌려 주고 백성을 쉬게 하자는 논의를 주도했으며, 예종의 화풍 위주 정책을 뒷받침하여 문치주의 이념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인종 때 거란을 멸한 금나라가 고려에 형제 맹약을 요구했을 때 이들은 성종 때 대거란 정책의 실패가 거란의 침입을 자초한 사실을 들어 금과의 형제 맹약을 주도했습니다. 이같이 정종 대 이후 12세기 예종인종 대의 정국을 주도하던 세력도 역시 내치 위주, 문치주의 성향의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문치주의 정치 이념은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념일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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