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이야기 고려사1. 고려 초기의 정치 이념

4) 국풍(國風)과 화풍(華風)의 정치 이념; 타협과 공존을 모색하다

고려 광종(光宗; 949-975년 재위)성종(成宗; 981-997년 재위) 때 중국 당(唐)나라 제도를 모델로 한 정치⋅군사⋅경제 제도 등 각종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려는 노력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고려사』의 이 무렵 기사를 읽다 보면 화풍(華風)과 국풍(國風)이라는 용어도 심심찮게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화풍은 글자 그대로 중화(中華)의 풍속과 제도이며, 구체적으로 유교적인 문물과 제도 등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뜻합니다. 이를 때로는 당풍(唐風) 혹은 ‘화하(華夏)의 제도’라고도 합니다. 한편 고려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국풍(國風) 혹은 토풍(土風)이라고 합니다.

선진 문물과 제도의 수용을 강조하는 측과 여기에 반발하는 측의 논의를 각각 화풍론과 국풍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고려 전기뿐만 아니라, 이후의 정치 사상사에서도 커다란 쟁점으로 이어집니다. 고려 전기의 지배층 내부에서 이러한 논의가 제기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의 자료를 읽어 보기로 합시다.

〔사료 1-4-01〕 『고려사』 권 14 예종 10년 7월 조

“돌이켜 보건대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화풍(華風)을 사모했습니다. 개보(開寶(968-975년): 중국 송(宋)나라 연호로 고려 광종 19-26년) 연간부터 송나라 신종(神宗(1067-1085년); 고려 문종 21-선종 2) 때까지 매번 사신을 보낼 때마다 학생들을 보내 중국의 문물 제도를 두루 살펴 유교적인 교화가 고려에 뿌리내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중단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중국의 문물 제도를 듣고 전하는 일이 아득하게 되었고, 관련 기록이 반이나 없어져 선비들 사이에서는 정론이 없게 되었습니다. 학문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혼탁한 말류가 횡행하여 학풍이 쇠퇴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물며 법도와 문물 제도의 격식이며 역대의 남아 있는 경전도 거의 없어 제가의 다른 학설을 유식자에게 질의하지 않는다면 어찌 장차 법을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예종(1106-1122년 재위)이 1115년 중국 송나라 황제에게 보낸 글의 일부입니다. 이에 따르면 고려 왕조는 광종(950-975년)부터 문종(1047-1082년)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사신과 학생의 파견 등을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 즉 화풍(華風)을 꾸준히 수용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단되면서 학술을 비롯한 문물 제도의 기준과 법식이 없어져 여러 가지 혼란을 겪게 되었고, 예종은 다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려는 의지를 위의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글이 작성된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선종에서 예종 때까지 약 30년간 화풍의 수용이 중단되었던 셈이 됩니다. 예종이 송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다시 화풍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 것이 바로 위의 글입니다. 예종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유신(儒臣) 김인존(金仁存)은 예종을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을 즐겨 사모한 군주’로 평가했습니다(『고려사』 권 96 김인존 열전). 예종은 이같이 어느 국왕보다도 화풍 수용에 강한 의지를 가졌던 군주였습니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고려에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 주고 화해하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 제기되었고, 성종도 이를 따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지백(李知白)은 이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합니다.

〔사료 1-4-02〕 『고려사』 권 94 서희 열전

“가벼이 토지를 베어서 적국에게 주는 것보다는 다시 선왕(先王)의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시행하고, 다른 나라(他方)의 이법(異法)을 행하지 말며 나라를 보전하여 태평을 이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먼저 신명(神明)에 고하여야 합니다. 그런 후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는 오직 임금께서 결단하셔야 합니다. 성종은 그의 말을 따랐다. 당시 국왕이 화풍을 좋아하고 사모하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지백이 이같이 말한 것이다.”

위의 글에서 중국의 문물 제도를 수용하려는 국왕 성종에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방책은 선왕, 즉 태조가 강조했던 팔관회연등회⋅선랑과 같은 전통적인 의례를 시행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이러한 의례를 통해 국력을 결집시키는 것이 침입을 막는 지름길이라 인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 의례는 성종이 즐겨 추구하던 화풍과는 다른, 국풍(國風)이자 토풍(土風)의 내용이 됩니다. 당시 나라 사람들이 성종이 추구하던 화풍 정책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풍을 강조하는 여론 또한 상당한 지지를 받으면서, 화풍론과 함께 당시 정치 사상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이지백의 문제 제기는 거란 침입의 위기 의식에서 나온 것이지만, 화풍의 일방적인 수용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종의 화풍 일변도 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정치 세력이 상당수 존재했고,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앞에서 그 동안 잠재되었던 불만이 드러난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짐작하건대 화풍을 주도한 세력이 위의 기록에서 거란에게 땅을 떼어 주자는 할지론자이며, 그에 반대한 세력이 이지백과 같은 국풍론자일 것입니다. 적의 침입 앞에서 마치 적전분열(敵前分裂)의 행동처럼 비쳐질 수도 있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 냈던 이지백의 행동을 볼 때 화풍론과 국풍론은 이미 그 전부터 상당한 논쟁을 일으켜 왔던, 당시 정치 사상사에서 뿌리 깊은 쟁점의 하나였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종이 중국에 보낸 국서에서 화풍은 광종 때부터 본격 도입되었다고 했으나, 이미 태조 때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지백은 ‘선왕이 행한 연등회팔관회⋅선랑의 행사’를 들어 화풍 반대의 논리를 제시했는데, 이는 태조 왕건연등회팔관회의 시행을 강조했던 훈요 제6조에 근거한 것입니다. 태조 왕건은 훈요(訓要) 제4조에서 외래 문물과 사조의 수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료 1-4-03〕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4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당풍(唐風)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을 모두 그에 따랐다. 그러나 (중국과는) 지역이 달라 사람의 품성도 각각 다르니, 반드시 그들과 같게 할 필요는 없다.”

위의 글에서 태조는 중국과 우리나라는 땅이 달라 사람의 품성도 다르므로 구차하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지백과 같이 고려의 고유한 제도와 풍속을 유지하려는 국풍론자의 생각은 이 같은 태조의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는 화풍을 당풍이라 했습니다. 물론 태조는 중국의 문물과 제도의 수용을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중국의 선진적인 것을 수용하되 일방적인 수용이 아니라, 고려의 현실에 맞도록 주체적, 선별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화풍의 본격적인 수용은 광종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수용의 원칙과 기준은 이미 태조 때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두 논의 가운데 어느 일방의 독주가 아니라, 공존하면서 서로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두 논의가 이후 고려의 정치 사상사에서 활발히 전개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훈요가 갖는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난 성종 원년(982), 최승로는 화풍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광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사료 1-4-04〕 『고려사』 권 93 최승로(崔承老) 열전

“쌍기(雙冀)를 등용한 이래로 문사(文士)를 존중하고 그들에 대한 대우가 지나쳤다. 이때부터 재주 없는 사람이 많이 진출하고 순서를 뛰어넘어 빨리 진급하여 일년이 되지 않아 문득 재상이 되었다. (광종은) 밤낮으로 이들을 맞이하고 접견하는 일을 기쁨으로 삼고, 정사를 게을리하여 나라의 중요한 일들이 막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주식(酒食)과 잔치가 그치지 않았다. 이에 남북의 용인(庸人)들이 다투어 의탁하였고, 지혜와 재주를 따지지 않고 모두 특별히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후생(後生)이 다투어 벼슬길에 나서고, 구덕(舊德: 덕망 있는 사람)은 점차 물러나게 되었다. 비록 화풍을 중히 여겼으나, 중화(中華)의 영전(令典: 아름다운 법)은 얻을 수 없었다. 화사(華士: 중화의 선비)를 예우했으나, 중화의 현재(賢材: 현명한 인재)는 얻지 못했다.”

최승로광종의 정치를 평가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는 광종이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과거제를 시행하는 등 화풍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귀화인을 우대하고 그들을 측근으로 삼은 광종의 정치로 인하여, 화풍의 핵심 내용인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물론 최승로가 화풍의 수용을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시무 28조’에서 화풍의 수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료 1-4-05〕 『고려사』 권 93 최승로(崔承老) 열전

“화하(華夏)의 제도인 화풍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방의 습속이 각기 토성(土性: 땅의 성질)을 따르기 때문에 모두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 가운데 예악(禮樂)과 시서(詩書)의 가르침, 군신과 부자(父子)의 도는 마땅히 중화를 본받아 비루한 것을 고쳐야 한다. 그 나머지 거마(車馬)와 의복 제도는 토풍(土風)을 따르게 함으로써 사치와 검소함의 중용을 얻게 하고, 반드시 같게 할 필요는 없다.”

시무 28조(『고려사』 최승로(崔承老) 열전)

최승로는 중국의 문물 제도를 모두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훈요의 취지를 따르면서, 수용의 범위와 내용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수용해야 할 화풍은 예악과 시서의 가르침, 군신과 부자의 도리 등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문물과 제도라 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낡은 정치와 가치관을 혁신하자는 것입니다. 한편 거마와 의복과 같은 제도는 고려의 고유한 제도와 풍속, 즉 토풍을 따르자고 했습니다. 이같이 광종에서 성종 대에 이르면 화풍론과 토풍론은 외래 문물의 수용을 둘러싼 새로운 정치 이념의 하나로 등장합니다.

고려 전기 정치 사상의 쟁점이 되었던 화풍론과 국풍론에 대한 논의는 결국 외래 문물과 제도의 수용을 둘러싸고 그 수용의 범위와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화풍론은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 수용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으며, 국풍론은 고려의 전통적인 제도와 풍속의 유지에 더 관심을 갖고서, 화풍의 수용으로 인해 전통의 의례와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이 논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각종 정치 경제적인 개혁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과 갈등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종 대의 거란 침입 때에 우리의 땅을 떼어 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을 주장한 정치 세력은 대체로 화풍을 중시하던 세력인 반면, 대거란 강경론자들은 국풍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중심의 유교 정치 이념에 반발하여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 사상 등에 근거한 서경 천도 운동은 화풍론과 국풍론을 주장하던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원 간섭기 충선왕은 통제론(通制論), 즉 원나라의 법과 제도를 고려에 이식시켜 고려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충렬왕은 국속론(國俗論), 즉 고려의 고유한 풍속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이상과 같이 화풍론과 국풍론을 둘러싼 논의는 결국 외래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고려의 고유한 풍속과 제도에 맞게 받아들이되, 어떻게 하면 마찰과 충돌 없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왕조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있었으며, 당시의 정치 사상사에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왜 고려 전기에 이러한 논의가 쟁점으로 부각되었을까요? 고려 왕조는 지방 세력인 성주 장군 등 이른바 호족(豪族) 세력의 연합에 의해 진골 귀족 중심의 골품 체제를 무너뜨리고 성립된 왕조입니다. 그러므로 왕조의 장기 존속을 위해서는 언제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지역에 기반을 둔 완강한 호족 세력에 의존하여 국가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 전기 사회의 과제는 이러한 호족 세력을 억제하고 정치 경제 사상의 모든 부문에서 새로운 지배 질서를 수립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새로운 왕조 체제에 걸맞게 중국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시대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광종 때의 과거제 도입은 지역 연고주의에 기반한 호족 대신 실력과 능력을 갖춘 새로운 관인층을 대두시키면서, 고려 전기의 지배 질서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당시의 화풍 수용은 하나의 시대적인 추세였던 것입니다. 반면 이로 인한 고려의 고유한 풍속과 제도가 변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습니다. 화풍론과 국풍론은 결국 외래 문물과 제도의 수용에서 어느 일방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는, 고려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균형추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고려 전기 정치 사상의 수준과 내용을 풍성하게 해 준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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