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료 생활의 이모저모
과거에 합격하면 관료 생활이 시작된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문과 출신과 무과 출신 사이에는 처우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문(文)에 비해 무(武)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팽배한데다가 무과의 경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수천 명 내지 만 명 이상을 선발하는 만과(萬科)가 시행되면서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자료는 문관과 무관의 지위 차이를 잘 보여 준다.
〔사료 1-2-01〕
“청원부원군 김시묵(金時黙, 1722~1772)이 병조판서가 되어 병마절도사 장지풍(張志豊, 1732~1770)을 불러 금군장으로 발탁했는데 찾아가 인사하는 것이 매우 늦었다. 김 공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임금은 병조에서 알아서 다스리라고 명령하였다. 김 공이 병조에 앉아 곤장을 잡고서 “곤장을 스스로 자초했으니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하자, 장지풍이 머리를 쳐들고서 “무관의 볼기짝은 개 볼기짝과 다를 게 있나요?”라고 하였다. 김시묵도 무관의 아들임을 지적한 것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병조판서는 정2품, 병마절도사는 종2품이다. 품계상으로 보면 김시묵이 상관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사가 늦었다는 이유로 병마절도사의 곤장을 친다는 것은 과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장지풍의 집안은 장지풍은 물론 그의 조부와 부친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던 이름 있는 무반 가문이었다. 장지풍의 이야기처럼 김시묵의 부친 김성응(金聖應)은 무과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김시묵은 문과 출신이었기 때문에 장지풍에게 위세를 부렸던 것이다. ‘무반의 볼기짝은 개 볼기짝’라는 장지풍의 자조 섞인 탄식이 조선 시대 무관의 처지를 잘 보여 준다.
관원들은 관료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혹스러운 의식에 접하게 된다. 신참례(新參禮)가 그것인데 신참례는 새로 벼슬길에 오른 신참들을 골탕 먹이는 관례를 말한다. 이이(李珥, 1536~1584)는 신참례의 연원에 대해 “고려 말에 권세가의 젖비린내 나는 자제들이 죄다 과거에 급제했을 때 이들을 분홍방(粉紅榜)1)이라고 지목하고 분격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였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장난거리를 만들어 그 오만방자한 기세를 꺾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신참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연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신참례가 생겨난 이유가 납득이 가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신참례는 없어지지 않고 악습으로 남았다. 신참례가 얼마나 심했는가는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들어 있는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료 1-2-02〕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인데, 그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房主)가 된다. 상⋅하 관원이 함께 내방(內房)에 들어가 정좌하며 그 외방(外房)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자리를 정하는데 그중에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枇房主)라 하고, 새로 들어온 관원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신귀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擎笏)이라 하며 들지 못하면 신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신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신귀에게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신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서함(刺書緘)2)을 만들어 날마다 선생 집에 던져 넣게 하고, 또 선생이 수시로 신귀의 집에 몰려가면 신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는데,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생에게 모두 여자 한 사람씩을 안겨 주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하며, 술이 거나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3)을 노래한다. (중략) 이런 풍습의 유래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성종이 이를 싫어하여 신래(新來)를 괴롭히는 모든 일을 엄하게 금하니, 그 풍습이 조금 없어졌으나 아직도 구습 그대로 폐하지 않은 것이 많다.
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
사헌부에서 행해지던 신참례 광경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신참례의 폐단을 막기 위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신래를 침학하는 자는 장(杖) 60에 처한다’는 규정을 넣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신참례 의식은 없어지지 않았다. 과거에 9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던 이이도 신참례를 피하지 못했다. 이이는 문과에 급제한 후 외교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에 소속되었는데 선배들에게 불공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적이 있었다. 이이와 쌍벽을 이루던 대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이 잘못된 시속이나, 이미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홀로 모면할 일은 아니다.”라면서 이미 풍속으로 굳어진 신참례는 피할 도리가 없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이는 악습이라고 생각했던 신참례의 혁파를 건의하였고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도 폐단을 인정하여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실록에는 선조의 명이 있은 후 신참례가 조금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신참례 풍습은 19세기 전후의 사정을 기록한 심노숭의 『자저실기』에도 보인다.
〔사료 1-2-03〕
나라의 풍속에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대과라 하고 생원 시험과 진사 시험을 소과(小科)라고 한다. 사관의 선배들이 새로 급제한 신례들을 마전교(馬前橋)4)로 불러 오라 가라하며 장난거리로 삼는다. 이름을 거꾸로 부르게 하여 ‘도함(倒啣)’이라 하고, 더러운 도랑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고 ‘게잡이[捉蟹]’이라 하며, 땅바닥에 누워 구르게 하고 ‘멍석말이[捲席]’라 하고, 하늘로 펄쩍펄쩍 뛰게 하고 ‘별따리[摘星]’라고 하였다. 박수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도 하고, 땅바닥에서 한 치 떨어지게 고개를 숙이게 하며, 얼굴에 먹물을 칠하기도 하고, 담을 타넘거나 춤을 추거나 한 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면서 가기도 한다. 우스꽝스럽고 괴이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중앙 관료로 활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방관 생활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지방관 노릇이라고 지적한다. 지방관 생활의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사료 1-2-04〕
세간의 온갖 일은 모두 할 만하나 지방관 노릇만은 하기 어렵다. 근래 삼정(三政)이 모두 피폐해져서 백성의 운명이 몹시 위태롭다. 너그럽게 하면 공사에 해가 되고 박절하게 하면 백성들을 병들게 한다. 게다가 안으로는 주사(籌司)5)와 탁지(度支)6) 등 여러 상급 관서가 있고 밖으로는 관찰사와 절도사 등의 여러 상급 영(營)7)이 있다. 지방관이 된 자는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백방으로 속이니 현명한 사람이라도 두루 살피기 어렵고, 거짓 장부와 잘못된 법규가 여러 해 동안 답습되어 정성이 있는 자라도 관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죄가 저절로 쌓여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처벌이 반드시 따른다. 면한 자들도 요행일 뿐 참으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 『수여연필(睡餘演筆)』
중앙관이나 지방관 모두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관료 생활을 한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고도 제대로 관직 생활을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문과의 경우 1차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100명, 3년에 1번 실시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에서 문과 33인이 선발되므로 30년이면 2,330명의 생원, 진사, 문과 합격자가 배출된다. 그런데 식년시 외에 알성시, 춘당대시, 절일제, 황감제 등의 특별 과거가 수시로 설행되었고 따로 별시, 정시, 중시 등의 임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합격자 수는 훨씬 많았다. 그에 반해 과거 합격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실제 관직 수는 5백여 자리에 불과하였다. 인사 적체는 불을 보듯 뻔하였다. 자연히 생원, 진사의 경우는 세력가들과 친해야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을 수 있었으며 문과에 급제해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한 번 체직(遞職)된 뒤에는 다시 진출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 동짓달에 심노숭은 한양에서 파주로 가다가 어떤 사람이 밭두둑에 쓰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인에게 가서 보라고 하니 죽은 사람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직접 가서 살펴보니 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심노숭은 하인에게 들쳐 업게 하여 객점으로 데려가 방에 눕혀 놓고 물을 데워 먹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사람이 깨어났다. 물어보니 정주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한 한형일(韓珩一)이라는 이였는데 그가 쓰러져 있던 이유는 이러하였다.
〔사료 1-2-05〕
몇 년 동안 한양에서 버텼으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러 개성에 있는 정주 상인을 찾아가 돈을 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틀이나 굶어 길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자신도 쓰러져 누운 줄 몰랐다고 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 『자저실기(自著實紀)』
『문과방목(文科榜目)』을 살펴보면 한형일은 평안도 영변 출신으로 1771년(영조 47)에 문과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난다. 성적은 합격자 74명 가운데 60등이었다.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엄연한 문과 합격자였다. 그렇지만 실록에 그의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성적이 나빴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안도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제대로 된 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한양에서 어렵게 버티다가 굶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심노숭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 한형일은 그 후 훈련원 보직에 임시 자리를 만들어 오래도록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을 채워 넣으라는 명이 내려지면서 관직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서울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형일의 서울 관료 생활은 혹독함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