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이야기 고려사2. 고려 중기 정치 이념의 성립

6) 왕조의 안정을 위하여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다

예종 4년(1109) 7월 고려 정부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립니다.

〔사료 2-6-01〕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 7월 조

“(1) 재신과 추신 및 대성(臺省)⋅제사(諸司)⋅지제고(知制誥)⋅시신⋅도병마사 판관 이상 문무 3품 이상을 선정전에 모아 9성을 돌려주는 일을 의논하니, 모두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다. 왕은 선정전에 거둥하여 요불 등을 인견하고 9성을 돌려줄 것을 윤허하였다. 요불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사례하였다.

(2) 중서시랑 평장사 임의(任懿)를 권판동북면(權判東北面) 병마사 겸 행영 병마사로, 우간의대부 김연(金緣)을 부사(副使)로 삼고, 그들에게 부월(斧鉞)을 내렸다.

(3) 윤관과 오연총이 돌아왔다. 왕은 승선 심후(沈候)를 그들이 오는 길에 보내어 (그들에게 내린) 부월을 거두게 하였다. 윤관 등은 복명(復命)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1)에서 고려 정부는 윤관 등이 정벌한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기로 결정합니다. 그 사정은 이보다 한 달 앞선 그 해 6월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벌 초기에 고려 정부는 여진과 고려의 관문이자 병목 지점인 궁한리(宮漢里)를 점령하면 여진의 침략을 쉽게 막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령 후 확인한 결과 이곳은 고려 침입의 병목이 아니라, 오히려 수륙(水陸)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쉽게 여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역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이곳을 거점으로 주변에 9성을 설치했으나, 계속되는 여진의 공격으로 인한 병력의 손실, 전염병 발생과 잦은 기근 현상, 군사 징발에 따른 백성의 불만 때문에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기로 한 것입니다.

(2)와 (3)의 사실은 당시 정벌의 최고 사령관 윤관과 오연총의 지휘권을 빼앗고, 대신 최고 사령관으로 임의(任懿)와 김연(金緣; 뒤에 김인존(金仁存)으로 개명)을 임명합니다. 궁한리 정벌론을 주장했던 최고 사령관 윤관에게 책임을 묻는 일종의 문책성 인사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최고 사령관의 교체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다음의 자료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 줍니다.

〔사료 2-6-02〕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 조

“(1) 8월에 신기 군사가 동계로부터 돌아왔다. 왕이 중관전 서쪽 누대에 거둥하여 그들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동쪽 전쟁의 패전은 장수의 허물이다. 짐이 어찌 너희들의 노고를 잊으랴.’ 하였다.”

“(2) 11월에 건덕전에서 조회를 열었는데 간의대부 이재⋅김연과 어사대부 최계방 등이 윤관⋅오연총⋅임언의 패전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다. 왕은 허락하지 않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재 등이 또 복합(伏閤)하여 굳게 청하자, 오시(午時)에 승선 심후에게 명하여 그들을 깨우쳤다.”

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여진 정벌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국왕 예종이나 관료 집단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패군의 죄로 최고 사령관에 대한 책임을 묻는 방식에 대해서는 국왕과 신하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국왕은 최고 사령관에 대한 임명을 철회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신하들은 처벌을 원했던 것입니다. 국왕이 처벌을 허락하지 않자, 이듬해 5월 당시 재상과 간관이 조회를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 문제는 결국 윤관 등이 9성을 수축할 때 내렸던 공신호를 박탈하는 선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국왕은 다시 그 해 12월 윤관문하시중으로 임명하면서 그의 명예를 회복시킵니다. 윤관이 이듬해(1111년; 예종 6) 5월 사망하면서 여진 정벌에 따른 논란도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9성의 반환은 정국 운영과 정치 질서가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한 조짐은 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종 원년, 신하들에게 시국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합니다. 신하들은 부왕 숙종의 원찰인 천수사(天壽寺)의 공사와 화폐 유통을 중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숙종 주도의 신법 개혁에 대한 당시 관료 집단의 부정적인 입장이 이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신법의 시행과 함께 강력한 대민 지배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국왕과 구법(舊法), 즉 기존 체제와 질서를 가볍게 고칠 수 없다는 관료 집단의 의견이 9성 반환과 윤관의 처벌을 둘러싸고 표면화된 것입니다. 결국 9성의 반환, 부왕인 숙종과 그 측근 윤관의 사망으로 부국 강병을 목표로 했던 신법 개혁은 동력을 잃어 더 이상 계승될 수 없게 됩니다.

예종은 이후 정국을 주도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관료 집단 대신 이자겸을 비롯한 외척 세력과 동궁 시절 자신을 보좌했던 관료들, 내시⋅승선⋅대간직 등에 있었던 한안인과 김인존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를 시도합니다. 유학생 파견과 함께 송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송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작합니다. 그러한 사정은 다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료 2-6-03〕 『송사(宋史)』 고려전

“아들 우(俁; *예종)가 즉위하자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또 학사 김단(金端) 등 5명을 (송나라) 태학에 입학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그들을 위해) 박사를 두었다. 정화(政和; 1111-1117년, 예종 6-12년) 연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예우를 하국(夏國)보다 위에 두었고, 요나라와 같이 추밀원에서 관장했다. (사신을 맞이하는) 관원인 인건압반관(引件押伴官)을 영접관(迎接官)으로 고쳤다.”

위의 기록과 같이 송나라는 예종 때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격을 높여 요나라와 같은 지위로 예우합니다. 송나라와 외교 관계가 단절된 지 50년 만인 1071년(문종 25) 이후 약 10년간 활발했다가 숙종 즉위 이후 주춤했던 대송 외교가 다시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종은 신하들과 유교 경전을 읽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經筵)을 강화하고, 궁중에 도서관 겸 학문 연구 기관인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淸讌閣)을 만들어 문신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학문과 유학을 장려합니다. 예종의 이러한 정책은 자연스럽게 유교 정치 이념과 문치주의를 심화하였으며, 이러한 이념을 지닌 정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됩니다. 즉 내치론이 다시 뿌리를 깊이 내리는 계기가 됩니다.

〔사료 2-6-04〕 『고려사』 권 96 김인존 열전

“왕은 총명하고 심후한 자질과 독실하고 빛나는 덕으로써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을 즐겨 사모하므로 대내(大內)의 곁 연영서전(延英書殿) 북편 자화전(慈和殿) 남쪽에 따로 보문(寶文)⋅청연(淸讌) 두 전각을 만들었다. 하나는 송나라 황제의 조칙과 서화를 받들어 높이 달아 훈계와 법칙으로 삼아 반드시 절하고 조아려 얼굴을 엄숙하게 한 뒤에 우러러보게 하고, 하나는 주(周)⋅공(孔)⋅가(軻)⋅웅(雄)으로부터 고금의 문서를 모아 날로 노사(老師) 숙유(宿儒)와 더불어 선왕의 도를 토론하고 부연하여서 장수(藏修)하며 유식(遊息)하는 것이 일당(一堂)의 상(上)에 나가지 않고도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가르침과 성명 도덕(性命道德)의 이치가 사방에 가득 차고 넘치도다. (중략)

(예종께서) ‘돌이켜 보건대 나는 덕이 보잘것없으나 하늘이 강녕(康寧)을 내리시고 사직이 복을 쌓아서 병갑(兵甲)은 3변(邊)에 쉬고 문궤(文軌)는 중하(中夏)와 같으니, 무릇 정사(政事)의 대소를 막론하고 자품(資稟)하지 않음이 없었다. 숭녕(崇寧)과 대관(大觀; 송 휘종 연호, 1102-1110년) 이래로 시설하고 조처하는 방법과 문각(文閣)⋅경연(經筵)에서 유아(儒雅)한 이를 찾아 구함은 선화(宣和; 송 휘종 연호, 1119-1125년)의 제도를 따르고, 심당(深堂)과 밀석(密席)에 보필하는 신하를 맞아 보는 것은 대청(大淸)의 연(宴)을 본받았다. 비록 예의 증감(增減)은 있으나 어진 이를 우대하고 능한 이를 숭상하는 뜻은 그 이치가 같다.’라고 하셨다.”

위의 글은 김인존이 예종의 명령을 받아 1121년(예종 16) 무렵에 쓴 「청연각기(淸讌閣記)」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김인존은 예종의 말을 빌려 당시 전쟁이 끝나고 국가가 편안하여 문물과 제도가 중국과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특히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각과 경연에서 유교 지식이 높은 선비들과 함께 학문과 정사를 의논하고,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숭상했던 예종을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인존의 생각은 당시 지배층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 100년 동안 고려와 거란의 영토 분쟁지였던 보주(保州)가 1117년(예종 10)에 고려의 영토로 귀속되면서, 이 무렵의 대외 관계도 안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정국은 부국 강병론과 같은 변법보다는 내치를 중시하고, 유교 정치 이념과 문치주의를 신봉하는 정치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위의 「청연각기」는 그러한 시대와 정국의 분위기를 잘 보여 줍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인종 때에도 이어집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변방의 방어 대책을 묻자, 당시 김부의(金富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료 2-6-05〕 『고려사』 권 97 김부의 열전

“두목(杜牧)이 시사(時事)를 말하기를, ‘상책(上策)은 스스로 다스림(自治)과 같은 것이 없다.’ 했습니다. 송나라 신종이 문언박(文彦博)과 더불어 변방 일을 의논할 때 문언박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먼저 스스로 다스릴 것이요, 가까운 곳을 소홀히 하고 먼 곳에 대해 수고하지 말라.’ 했습니다. 왕안석(王安石)이 말하기를, ‘문언박의 말이 진실로 맞습니다. 만약 능히 스스로 다스리면 70리라도 가히 천하에 왕 노릇을 할 것이라.’ 했습니다. 맹자는, ‘천리 땅을 가지고 남에게 두려워할 자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만리의 천하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스스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삼한(三韓)의 땅이 어찌 70리뿐이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그 잘못은 먼저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김부의는 변방의 방어책, 즉 외적의 침입과 같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치(自治)라 했습니다. 자치에 대하여 그가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청연각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왕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등용하여 그들에게 정사를 묻고, 상벌을 공정하게 하여 민심을 얻는 것이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길이자, 이것이 바로 자치의 핵심이 되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유교 정치 이념이 지향하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만이 변방 문제에 대처하는 지름길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김부의의 이러한 생각이 내치론의 핵심을 잘 전달해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내치론은 국가의 체면과 명분을 우선하는 강력한 배외 정책보다는 안정된 대외 관계를 우선시했습니다. 금나라가 거란을 없애고 고려에 형제 맹약 맺기를 요구하자, 김부의는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합니다.

〔사료 2-6-06〕 『고려사』 권 97 김부의 열전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당(唐)나라가 돌궐에게 혹은 신하라 일컫고 혹은 공주를 내려 시집 보내는 등 무릇 화친할 만한 것은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지금 송나라도 거란과 더불어 서로 백숙 형제(伯叔兄弟)가 되어 대대로 화친하여 서로 통하니 천자의 높음은 천하에 대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랑캐 나라에 굴하여 섬기는 것은 이른바 성인은 임시방편[權]으로써 도(道)를 이룬다는 것으로, 이는 국가를 보전하는 좋은 계책이 됩니다. 옛날 성종이 변방을 다스리는 데 실책을 저질러, 급하게 요나라 사람들의 침입을 받았던 사실을 진실로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신이 엎드려 원하건대 성조께서는 장구지책(長久之策)을 생각하셔서 국가를 보전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김부의는 형제 맹약이 일시적으로는 굴욕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를 보전하는 좋은 계책으로 생각했습니다. 형제 맹약이라는 임시 변통(權)으로써 금나라와의 전쟁을 막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안정이라는 도(道)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크게는 내치론자들의 대외관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김부의의 형인 김부일(金富佾)의 생각도 내치론자들의 대외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지자 거란은 고려에게 여진족을 협공하자고 제의합니다. 이에 대하여 김부일은 ‘여진 정벌 이후 군민(軍民)이 겨우 휴식을 얻게 되었는데, 이제 다른 나라를 위하여 군사를 내면 이것은 스스로 틈을 내는 것이니 이해를 알 수 없다.’ 하여 반대합니다. 이러한 생각 역시 내치론의 대외 정책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내치론은 예종인종 대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당시의 정국을 주도합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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