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잡록(雜錄)⋅필기(筆記)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2. 중인의 삶

3) 중인 아닌 중인 서얼

서얼(庶孼)은 첩의 자식을 의미한다. 엄밀하게는 양인 첩의 자식은 ‘서(庶)’, 천인 첩의 자식은 ‘얼(孼)’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첩의 신분에 상관없이 첩의 자식은 서얼로 불렸다. 중인들은 서얼과 같은 부류로 취급당하는 것을 싫어하였지만 서얼중인 취급을 받아 중인과 함께 흔히 ‘중서(中庶)’로 불렸다. 남성들은 후사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혹은 성욕의 해소 수단으로 첩을 두었다. 첩을 두고 첩에게서 아이를 낳는 것은 아무런 흠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1590년(선조 23)에 우의정을 지냈던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75세와 81세 때 각각 비첩(婢妾)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81세에 아들을 낳았을 때는 사람들이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이라며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축하까지 했다고 한다. 서얼이 양산되는 것은 당연하였는데 정작 첩에게서 얻은 자식은 차별하였다. 서얼의 처지는 다음 자료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료 2-3-01〕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아버지가 천령(天嶺)1) 태수가 되어 백성을 다스릴 때 사사롭게 고을 아전을 위협하여 딸을 자광에게 시집보내게 하였다. 자광이 서자인지라 아전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딸의 운명은 점치는 자마다 말하기를 ‘마땅히 1품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서자에게 시집가게 되었으니 원한이 막심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자광이 끝내 1품에 오르고 그 딸이 정경부인이 될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효빈잡기(效嚬雜記)』

유자광의 아내는 함양 지방의 호장(戶長)을 지낸 박치인(朴致仁)의 딸이다. 위의 기사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서얼을 무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양반가의 서얼향리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어머니에 관한 일화는 좀 더 직접적으로 당시 서얼의 위치를 보여 준다. 첩이었던 그녀는 양사언의 부친이 죽자 자결을 결심하고 부친의 친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사료 2-3-02〕

“제가 낳은 아들 하나가 사람됨이 그다지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우리나라 풍속에 천한 서얼로 태어나면 제 아무리 어른이 될지라도 어디에 쓰이겠습니까? 여러 도련님들께서 비록 격의 없이 은혜와 사랑을 주고 계시지만 제가 죽고 나면 서모의 복을 입으실 겁니다. 그리되면 적서의 구별이 현격한지라,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행세를 하겠습니까. 제가 오늘 자결을 하여 나리마님의 상중에 임시방편으로 함께 장례를 지른다면 아마도 적서의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어른들께서는 곧 죽을 이 사람을 가엾이 여기시어 저승에 하늘 품고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편자 미상, 『기문총화(記聞叢話)』

자신이 죽을 테니 대신 아들을 서얼 취급을 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호소였다. 양사언의 모친은 결국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었고 그녀의 부탁대로 집안에서 양사언을 친자식처럼 대우하여 후일 사람들도 양사언이 서얼인 것을 몰랐다고 한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려(金鑢, 1766~1822)의 『담정유고(藫庭遺藁)』에는 그림을 잘 그렸던 서얼 출신 김용행(金龍行, 1753~1778)의 전기가 들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김용행은 거나하게 취하면 슬픈 표정을 짓고 “쯧쯧! 내가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야.”하면서 탄식하였다고 한다. 서얼들에게 조선은 담장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성리학의 본말론(本末論)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적자가 근본인데 반해 서얼은 말단이므로 서얼이 차별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16세기 이후 성리학이 지방 사회에까지 확산⋅보급되면서 반상의 구분과 적서의 차별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왕실에서도 후궁이 낳은 군 내지 옹주는 서얼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어 차별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정황은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료 2-3-03〕

인조 무자년(1648년, 인조 26)에 왕녀 효명옹주(孝明翁主)2)가 나이 11세에 혼례를 올린 뒤 3일째 되는 날 잔치를 베풀었는데 인평대군의 부인 오씨와 여러 종실의 부녀가 모두 참석하였다. 장차 자리에 나아가려고 할 적에 옹주를 모신 자가 말하기를 “옹주가 비록 서출이지만 지극히 존귀하여 등급이 없으니, 마땅히 자리를 오씨의 오른편에 하여야 합니다.”하고, 오씨는 말하기를 “나의 급수는 비록 옹주의 아랫니지만 마땅히 적서의 차례대로 앉아야 한다.”하며 서로 고집하여 결정이 나지 않았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대군의 부인은 정1품이지만 옹주는 품계를 초월한 존재이다. 지위상으로는 옹주가 대군 부인에 비해 더 높지만 오씨는 옹주가 서출이라 하여 자기가 더 존귀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결론이 나지 않자 대내에 아뢰니 결국 옹주를 위에 앉히게 했는데 그 뒤로 형제 간의 정의가 갑자기 멀어졌다고 한다.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의 부마였던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의 기록에 나오는 것이니 위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일차적인 차별은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서얼은 가정 내에서 부친과 형제를 제대로 호칭하지 못하는 설움을 겪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은 아버지 홍 판서에게 ‘그 부친을 부친이라 하지 못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라면서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였다. 서얼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적자들과의 관계였는데 다음은 그러한 상황을 보여 준다.

〔사료 2-3-04〕

채정린(蔡廷麟)은 서파(庶派) 출신 문관이었다. 글을 잘하고 조심성이 있어 재상들이 가상히 여겨 천거하여 낭천(狼川)3) 현감이 되었다. 흉년을 만나니 적족(嫡族)으로 고향에서 어렵게 사는 이들이 친히 이고 지고 관가로 줄지어 와서 빌려 달라고 졸랐다. 정린이 싫어하거나 고달프게 여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정성껏 접대하였다. 그래서 관가의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다 써버려 관직에서 파면당하고 죄를 받았으나 말하기를 “벼슬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적족과 화목하지 못하면 어찌 세상에 나설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벼슬을 잃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정재륜(鄭載崙, 1648~1723),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서얼은 내키든 내키지 않든지 간에 적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파직당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적족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서얼들의 숙명이었다.

서얼들은 법제적인 차별도 감수해야 했다. 조선 정부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서얼과거 등용을 금지하여 서얼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입신의 관문인 과거에 응시조차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매우 가혹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름을 날린 서얼도 있었다.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은 서얼이었지만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며 이이성혼 등과 교유하였고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지도하였다. 후대에 송익필⋅이이성혼 사이에 왕래한 편지를 모아 「삼현수간(三賢手簡)」으로 제작하였던 데서도 송익필의 위상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송익필은 서얼 가운데 예외적인 경우였고 대부분의 서얼들은 힘겹게 살 수밖에 없었다.

「삼현수간(三賢手簡)」
송익필, 성혼, 이이 사이에 왕래한 편지를 모은 것이다.
(소장 : 삼성 리움미술관)
자료 출처 ▶ 문화재청 > 문화유산정보 > 유형분류 > 기록유산 > 서간류 > 간독류 > 보물 제1415호 삼현수간

서얼은 능력에 상관없이 사회적인 냉대를 받았는데 이는 이대순(李大醇)의 경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대순은 경학에 정통하고 예문(禮文)을 많이 알아 이름이 알려져 동몽훈도(童蒙訓導)를 지냈던 인물이다. 그가 가르친 학생 가운데는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들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난 뒤 금천(衿川)4) 땅에 임시로 거처하였는데 그의 곤궁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한 대신이 그에게 다시 훈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훈도 생활은 괴로움 그 자체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 자료에서 확인된다.

〔사료 2-3-05〕

이생(李生)이 서울에 와서 숭례문 안에 임시로 사는데 원근에서 공부하러 오는 관동(冠童)들이 꽤 많았다. 이생은 평시의 훈몽(訓蒙)하는 법에 의하여 읽은 책을 외게 하고 외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순서를 따져 먼저 온 자는 먼저 가르치는 등 그 과정을 엄하게 하고 모두 연치를 따지게 하였다. 그러자 학도들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아무개는 서얼인데 내가 어찌 그의 밑에 앉는단 말인가? 또 내가 비록 뒤에 왔지만 제가 어찌 나보다 먼저 배운단 말인가?”하며 세력을 믿고 기를 부려 매양 서로 구타하므로 한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이생은 그 괴로움을 이길 수가 없어 조금 경계하고 책하면 반드시 대면하고 욕을 하는 것이었다.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죽창한화(竹窓閑話)』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조선의 3가지 큰 우환으로 문관이 무관을 멸시하는 것, 속인이 승려를 천대하는 것과 함께 사대부서얼을 짓밟는 것을 들었다. 서얼 차별을 우환으로 본 것은 계속된 차별로 인해 서얼들이 원한이 쌓여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국가에서도 서얼의 딱한 처지를 알고 있었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는 일찍이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가는데 잔가지도 가리지 않듯이 신하가 충성을 하려고 하는데 어찌 정적(正嫡)에만 국한하겠느냐?”며 적서 차별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서얼들도 점차 자신들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즉위하자 정진교(鄭震僑)를 중심으로 한 260여 명의 서얼 유생들이 통청 운동을 벌였으며, 1772년(영조 48)에는 경상도 서얼 유생 진성천 등 3,000여 명이 소를 올려 지방 서얼의 문제점을 호소하였다.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였던 영조는 특히 서얼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서얼도 청요직에 등용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린다는 조치를 내리는 등 서얼 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취하였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영조의 정책을 계승하여 즉위하자마자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반포하여 서얼의 관직 진출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였으며 규장각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얼 출신 학자들이 검서관으로 발탁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차별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1823년(순조 23) 전국의 서얼 유생 9,996명이 연명으로 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상소에 따르면 서얼들의 처지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여전히 차별에 시달리고 있었다.

축첩 제도가 제도적으로 금지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축첩은 여전히 성행하고 별다른 비난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3년 간통제가 생겨나면서 비로소 축첩은 불법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 사이 수많은 서얼은 차별과 냉대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꾸려야 했다.

1)지금의 함양
2)인평대군의 서매(庶妹)
3)지금의 화천
4)지금의 시흥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