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이야기 고려사2. 고려 중기 정치 이념의 성립

4) 숙종의 과감한 정치 실험; 부국 강병 정책

역사에서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던 변동기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때로 딱딱하고 지루하기조차 한 역사 공부에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역사 공부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지요. 변동기에는 위기가 뒤따르는 일이 다반사이며, 그런 시대일수록 다재다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고려 숙종(1096~1105년 재위)이 재위했던 12세기 초도 이러한 사례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무렵은 한국사에서 전례 없이 부국 강병을 앞세운 개혁 정책이 추진되었고, 이를 둘러싼 찬반 논의가 풍미하던 시기였습니다.

숙종 원년(1096년)에 술사(術士) 김위제(金謂磾)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사료 2-4-01〕 『고려사』 권 122 김위제 열전

“『도선기(道詵記)』라는 책에 따르면, ‘고려 땅에 개경서경남경3경을 두고 각각 4개월씩 국왕이 머물게 되면 36국이 고려에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이다. (중략) 왕조 개국 후 160여 년이 지난 후에는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도선의 『답산가(踏山歌)』에 따르면, ‘(남경에 도읍하면) 사해(四海)의 신어(神魚)가 한강(漢江)에 조회(朝會)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대평(大平)을 이루게 된다.’라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한강의 양지에 도읍하면 기업(基業)이 장원(長遠)하고 사해가 내조하며 왕족이 창성할 것이니, (남경은) 실로 큰 명당의 땅이 됩니다.”

그는 승려 도선의 풍수도참 사상을 근거로 내세워, 개경에서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지를 옮기자고 했습니다. 그가 수도 천도론을 제기한 때는 숙종 원년(1096)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한 936년으로부터 꼭 1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적절한 시점에 남경 천도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안의 이면에는 바로 국왕 숙종의 정치적 의중이 담겨 있습니다. 숙종도선의 예언에 가탁하고 김위제라는 술사(術士)의 입을 빌려 천도론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바로 천도론을 제기했을까요? 숙종이 즉위할 무렵의 고려 사회는 그야말로 전 사회에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천도론은 이러한 위기 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도의 노림수가 숨겨져 있는데, 쿠데타를 통해 어렵사리 즉위한 숙종은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국왕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다지고자 했던 것입니다.

숙종은 외척 문벌 등 당시 기득권층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개경 대신 새로운 정치를 펼치기 위하여 도선의 풍수도참 사상에 근거한 남경을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부왕인 문종 때 이미 제기된 바 있습니다. 문종은 관료 집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흥왕사를 건립하고,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개경 근교에 장원정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문종은 당시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킨 바 있는데, 이 조치가 그의 아들인 숙종 때 이곳으로 천도하려는 정책으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숙종의 천도론은 문종 정책의 계승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문종숙종은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라면 불교나 풍수도참 사상까지도 통치 이념으로 수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숙종이 즉위할 무렵의 고려 사회는 상하 계층 간의 반목과 질시, 민심의 이반, 왕실과 외척 세력 간의 갈등 등으로 곳곳에서 위기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권세가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거나 대외 무역에 뛰어들어 경제권과 유통권까지 장악했습니다. 이들에게 시달리던 백성들은 불만이 쌓이고 쌓여 도적이나 유민이 되어 이곳 저곳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례가 속출했으며, 심지어 미륵불이 출현했다느니 하는 각종 유언비어도 난무했습니다.

대각국사비 탁본
출처: 국립 중앙 박물관

이 같은 권세가들의 토지 탈점과 유통 경제 장악에 따른 심각한 민심 이반 현상에 대응하기 위하여, 동생인 승려 대각국사 의천(義天)숙종에게 화폐 유통을 건의합니다. 그는 화폐 유통의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백성들이 소나 말로 쌀을 운반하는 고통을 면제해 주고, 쌀에 모래를 섞거나 무게를 속이는 등의 간교한 짓이 사라져 곤궁한 백성을 구할 수 있으며, 또한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쌀이 관료들에게 제때 공급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수재와 화재로 인한 쌀 보관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화폐 유통의 이점을 살리기 위하여 의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료 2-4-02〕 『대각국사문집』 권 12 주전론

“전(傳)에 이르기를, ‘때를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것입니다. 좋은 때는 두 번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밝으신 지혜로 결단하시고 과감하게 실행하시면 그것은 국가의 복이 될 뿐만 아니라, 만세에 백성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대각국사 의천 영정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선현의 표준영정

숙종은 동생 의천의 제안을 받아들여 1097년(숙종 2년) 화폐 유통 정책을 실시합니다. 이 시책은 화폐 유통을 통하여 국가가 유통 경제를 장악하고, 유통 과정에서 문벌 등 권세가나 대상인들의 민에 대한 수탈을 방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화폐 유통 정책은 숙종이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재정 정책의 하나였지요.

해동통보
출처: 국립 중앙 박물관

이 외에도 숙종은 해동통보 등 각종 화폐를 만들고 그것을 유통시키기 위하여 수도 개경서경에 상점을 설치하는 등 상업을 육성하고자 했습니다. 교통과 상거래의 주요 요충지인 관진(關津)에서는 상세(商稅)를 거두어 국가의 재원으로 삼았습니다. 공상(工商)을 억제의 대상이 아닌, 농업과 함께 경제의 한 축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각 군현은 5결씩의 관유지를 확보하여 경작하게 하고, 그 비용으로 외관 녹봉의 일부를 주어 중앙 정부의 재정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져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통합해 힘을 불려 나가면서 수시로 고려 국경에 출몰함으로써 군사 충돌이 잦아져 대외적인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숙종은 1104년(숙종 9)에 여진족이 함경도 정주(定州) 지방에 군사를 주둔시키자, 이를 계기로 여진 정벌을 단행합니다. 윤관(尹瓘)숙종이 임명한 측근들을 중심으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지만 예상외로 완강한 여진의 저항으로 1차 정벌은 실패합니다. 윤관은 다시 여진 정벌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합니다.

〔사료 2-4-03〕 『고려사』 권 96 윤관 열전

“제가 적의 기세를 보니, 그 강성함이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군사를 휴양(休養)시켜 후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패한 것은 적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라 가히 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관숙종에게 건의하여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고, 말을 가진 자는 모두 신기군(神騎軍)으로, 말이 없는 자는 신보(神步)⋅도탕(跳蕩)⋅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등(發火登)군으로,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으로 각각 편성합니다. 전국의 20세 이상 남자는 과거 응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기에 소속시켰습니다. 별무반의 편성은 왕권을 강화하고 전국의 군역(軍役) 자원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숙종이 서거하자 즉위한 그의 아들 예종은 부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즉위 2년(1107) 윤관을 사령관으로 하여 제2차 여진 정벌을 단행합니다. 윤관은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지역에 9성을 수축합니다. 윤관은 임언(林彦)에게 명령하여 9성의 하나인 영주(英州) 관아의 벽에 9성 수축에 관한 사실을 쓰게 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료 2-4-04〕 『고려사』 권 96 윤관 열전

“맹자가 말하기를, ‘약함은 진실로 강함을 대적하지 못한다. 작은 것은 진실로 큰 것을 대적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읊조린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이 말을 믿을 수 있다. 여진은 우리나라에 비하여 강하고 약함, 많고 적음의 세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을 만큼 힘이 약하고 세가 작은데도, 몰래 우리의 변방을 노려 왔다. 숙종이 즉위한 지 10년이 되는 해에 틈을 엿보고 난을 일으켜,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이고 붙잡아 가서 노예로 삼은 일이 많았다.”(『고려사』 권 96 윤관 열전)

왕실과 경원 이씨의 혼인 관계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2007, 69쪽

윤관은 고려가 여진에 비하여 결코 약하고 작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진 정벌은 정당하다는 당당한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9성은 방어의 어려움 때문에 예종 4년(1109)에 다시는 침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여진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리고 여진 정벌에 대한 실패로 윤관의 관직이 삭탈됩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조정의 여론은 여진 정벌에 대해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척경입비도(윤관9성을 개척하고 비석을 세우는 장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2007, 7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왕과 그 측근이었던 윤관 중심의 정치 세력은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없다는 맹자의 말을 빌려 정벌을 강행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결국 별무반이라는 군사 기구를 통하여 국가가 전국의 백성들을 직접 장악하는 한편, 정벌을 통한 국토 확장과 함께 기득권을 가진 문벌 중심의 정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국왕과 측근 윤관을 중심으로 한 정치 주도 세력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숙종은 왜 이러한 정책을 펼치게 되었을까요? 숙종이 느꼈던 위기감은 200여 년을 유지해 왔던 고려 왕실이 외척 세력에 의해 유린당함으로써 왕실의 혈통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왕실을 위협하던 세력은 외척인 인주(仁州) 이씨 가문입니다. 문종 때 수상을 지냈던 이자연(李子淵)은 세 딸을 문종에게 출가시켰으며, 13남 2녀나 되는 문종의 자식은 모두 이자연의 외손입니다. 그 가운데 숙종은 3남입니다. 부왕 문종을 이은 장남 순종은 즉위하자마자 바로 병으로 서거하였고, 뒤를 이어 2남인 선종이 즉위하였습니다. 3남인 숙종까지 세 아들이 국왕이 되었을 정도로 자식들도 출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자연의 세 딸 외에 다른 두 명의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어, 그야말로 이 집안의 위세는 왕실을 압도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문종의 둘째 아들 선종이 죽자 그 아들 헌종이 11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병 때문에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을 합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외삼촌 이자의(李資義)가 궁정을 들락거리면서 태후와 짜고 헌종의 배다른 동생을 왕으로 세울 것을 모의합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계림공(뒤에 숙종)은 마침내 왕국모, 고의화 등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서 이자의와 태후 등을 처단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기록에는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고 하나, 사실은 숙종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기회를 노리다 마침내 이자의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쿠데타였지요.

숙종은 끊임없이 정책 이슈들을 만들어 내며 정국을 주도해 나갔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를 돌파하면서 왕과 왕실의 권위 회복을 꾀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정치 이념이 나타난 것입니다. 숙종이 시도했던 수도 천도, 화폐 유통, 여진 정벌과 같은 일련의 정책들을 흔히 신법(新法) 정책이라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부국 강병이라는 일종의 공리(功利)주의 정책을 말합니다. 숙종의 재위 10년과 예종 전반기까지 약 15년간 이 정책은 유지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왕조의 최고 경영자로서 외척의 기세를 누르고 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지면서, 나라 안팎의 위기를 일거에 타개하기 위한 정치 이념인 것입니다.

숙종의 정책은 당시 송나라에서 시행된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고려사』에서도 이것을 신법이라 불렀지요. 적극적인 대외 경략과 과감한 재정 개혁을 통하여 개인이나 사문(私門)이 아닌 국가의 부(富)를 확대하는 정책입니다. 즉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상적으로 유교 정치 이념과 함께하면서도 때로는 불교, 풍수도참 사상과 같은 이념도 적극 수용할 뿐만 아니라, 여진 정벌과 같은 적극적이고도 강경한 대외 정책을 통하여 기존의 정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미 그 조짐은 숙종의 부왕인 문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문종은 유교 정치 이념 외에도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수용하고, 송나라와의 외교 재개를 통해 거란을 견제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침으로써 왕실과 왕권의 강화, 나아가 국가 주도의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정책을 외치론(外治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치론, 즉 신법의 추진으로 숙종은 외척의 기세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고려 사회는 그로 인해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4, 5년에 걸쳐 여진 정벌과 수도 천도 사업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요.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十室九空)’라는 당시 기록이 말해 주듯이, 백성들이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여 집을 버리고 도망하는 현상이 만연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음 시기에 역사적 부담을 안기기는 했지만 신법, 즉 부국 강병론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정치 이념이 고려 시기의 정치 사상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편 이에 대하여 관료 집단은 민생 안정과 안정적인 대외 관계를 통하여 내치(內治)의 안정과 문치 위주의 유교 정치 이념을 고수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내치론(內治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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