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2. 고구려의 주몽 신화 읽기2) 고구려 주몽 신화의 전승 자료와 내용

마.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왕⋅대무신왕 조 - 부여와의 관계 기사

〔사료 2-2-07〕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왕⋅대무신왕 조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라고도 하였다. 주몽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전에 주몽은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곧 나의 아들이오.’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2년(기원전 18) 가을 7월에 다물후(多勿侯) 송양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22년(서기 3)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國內)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4년(기원전 6) 봄 정월에 부여 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 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으므로 대소가 성을 냈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28년(서기 9) 가을 8월에 부여 왕 대소(帶素)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우리 선왕과 당신의 선군인 동명왕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동명왕이) 우리 신하들을 꾀어내어 도망쳐 이곳에 와서 성을 수리하고 백성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대개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가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이며, 어린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나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이에 왕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사가 약하니, 이런 정세에는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때 왕자 무휼(無恤)이 나이는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의 요구에 따르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신령(神靈)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는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참언하여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도망 나온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전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경멸하니,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아뢰시오. ‘지금 여기에 알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부여 왕이 듣고 (그 뜻을)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한 할멈[老嫗]이 대답하였다.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자신의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굴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29년(서기 10) 여름 6월에 모천(矛川) 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지어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사람들이 “검은색은 북방 색이다. 북부여가 파멸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32년(서기 13) 겨울 11월에 부여군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려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33년(서기 14)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37년(서기 18) 겨울 10월에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쪽 들[東原]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서기 14)에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어머니는 송(松)씨로 다물국 송양왕의 딸이다.

대무신왕 3년(서기 20) 3월에 동명왕 묘(東明王廟)를 세웠다.

9월에 왕은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거루(駏䮫)라고 이름하였다.

10월에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해서 붉은 색이 되었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차지할 것입니다.”

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 왕이 얻어서는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4년(서기 21)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을 내 밥이 지어지므로, 군대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이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여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은) “하늘이 준 것이다.” 하고 절하며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며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가 왕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은밀히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은 따라가서 부여 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청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또 허락하였다.

5년(서기 22)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어 병졸들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 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으며,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 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 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 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것을 주었다.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랐다.

3월에 신비로운 말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거느리고 학반령 아래 차회곡(車廻谷)에 이르렀다.

4월에 부여 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 왕 금와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해두국(海頭國) 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曷思國)의 왕이 되었다.

7월에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 왕의 어머니인 송씨와 대무신왕의 출생 연도

다물국 왕 송양의 딸인 유리왕의 정비 송씨는 「유리왕본기」에 의하면 기원전 17년 10월에 사망하였다. 대무신왕이 서기 14년에 11세였으므로 서기 3년에 태어난 것이니, 왕비 송씨는 혈연적으로 결코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 기사에 착오가 있거나, 아니면 송씨가 정비이므로 유리왕의 모든 자식이 아들로 인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송씨가 어머니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무신왕의 정치적 기반이 비류부(다물국 왕)였을 가능성도 있다. 뒤의 15년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대무신왕이 비류부의 3부장을 퇴출시킨 사건은 비류부와 대무신왕의 정치적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 대무신왕의 동부여 정벌과 가신(家臣) 세력

이 기사는 대무신왕의 동부여 정벌이 갖는 정당성을 보여 주는 기사이다. 그 중에서도 부정(負鼎)씨, 괴유(怪由), 마로(麻盧) 등 3인의 출현은 대무신왕의 무력 기반을 제공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서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할 때 3인의 세력을 받아들였으며, 유리왕도 부여에서 남하하면서 3인의 가신을 이끌고 있다. 대무신왕의 동부여 정벌 시 나타난 3인도 마찬가지로, 가신적 성격을 갖는 인물들의 가계 전승이 대무신왕 대의 건국 설화와 결합하여 기술된 것이다.

▣ 사성(賜姓)의 의미

건국 초기에는 아직 관등제 등 지배층을 편제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대신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신료로 편입하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여기 중실씨(仲室氏), 소실씨(少室氏) 외에도 대무신왕 대에는 대실씨(大室氏)라는 성씨를 하사한 예가 있는데, 이를 통해 세력의 크기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성씨를 주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 대무신왕의 왕호

본기에 대무신왕의 또 다른 왕호로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임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광개토왕비에는 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5세기 초까지 공식적인 왕호는 주류왕(朱留王)이었다. 대무신왕이라는 왕호는 동명성왕, 유리명왕과 더불어 평양 천도 이후에 일괄적으로 바뀐 왕호로 추정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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