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이야기 고려사1. 고려 초기의 정치 이념3) 훈요십조 이야기

가. 위조 시비에 몰린 훈요십조

고려 태조 왕건이 죽기 1개월 전 그의 측근 박술희에게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 이하 훈요로 줄임)」는 연구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요즈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유명세(?)를 타는 역사 자료입니다. 고려 왕조의 통치 지침이 되는 열 가지 조항의 정책이 담긴 이 자료는 실제로 왕조 기간 내내 중대한 정책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하나의 준거로 인용되었던 고려 왕조 통치의 커다란 강령으로서, 지금의 헌법에 준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만큼 중요한 자료입니다.

『고려사』 훈요십조(태조 26년 기사)

왕건은 왜 훈요를 작성했을까요? 왕건은 20세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온갖 전장(戰場)을 누비며 승승장구한 끝에, 궁예의 신임을 받아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다 42세에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왕조를 건국했으며, 다시 후백제 견훤과의 18년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60세 되던 해에 마침내 천하를 통일합니다. 무려 40년이라는 생애 대부분을 전장에서 누빈 셈입니다. 왕건의 표현을 빌리자면 ‘즐풍목우(櫛風沐雨)’, 즉 바람결에 머리를 빗고 빗물에 목욕을 할 정도로 고군분투한 끝에 그는 왕조를 건국했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단순히 창업 군주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적절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려 왕조는 자신의 분신이자 생애의 모든 것이 집약된 하나의 인격체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것처럼, 고려 왕조 역시 누군가에게 쉽게 찬탈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항상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멍에로 남아 있었습니다. 왕조의 장기 존속은 통일 후 7년간의 그의 마지막 생애 내내 중요한 화두의 하나였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훈요가 작성된 정신사적 배경은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서가 한때 유실될 위기를 겪습니다.

〔사료 1-3-01〕 『고려사』 권 98 최제안(崔齊顔) 열전

태조 훈요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

전후 관계로 미루어 병란은 거란의 침입이며, 훈요가 소실된 것은 개경이 점령당했던 현종 2년(1011) 1월 무렵으로 생각됩니다. 현종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013년 9월에 소실된 일곱 국왕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 위하여 황주량(黃周亮)⋅최충(崔冲)⋅윤징고(尹徵古)⋅주저(周佇)를 편찬자로 임명합니다. 이들은 고로(古老)들을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1034년(덕종 3) 마침내 병란으로 소실되었던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 등 일곱 국왕의 실록인 『7대실록(七代實錄)』 36권을 완성합니다. 이는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료 1-3-02〕 『고려사』 권 95 황주량 열전

“거란이 개경을 함락하여 궁궐을 불태워, 서적이 모두 불탔다. (황)주량은 (편찬의) 조칙에 따라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칠대 사적(七代事跡) 36권을 편찬하여 바쳤다.”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훈요도 『7대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 수집 과정의 하나였으며, 이때 발견된 것이 『태조실록』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태조가 박술희에게 준 훈요가 어떻게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것일까요? 훈요의 첫머리에 태조가 “내전(內殿)에 거동하여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친히 훈요(訓要)를 주었다.”라고 했습니다. 왜 태조는 특별히 박술희를 불러 그에게 훈요를 주었을까요?

당시 박술희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능합니다. 태조의 장남 혜종이 태자로 책봉되고 태조의 뒤를 이어 국왕으로 즉위하는 데 박술희는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이 사실은 그의 열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료 1-3-03〕 『고려사』 권 92 박술희 열전

태조가 임종 시에 군국(軍國)의 일을 부탁하여 이르기를, ‘경(卿)은 태자를 부립(扶立)하였으니 잘 보좌하라.’ 하니, 박술희(朴述熙)가 한결같이 유명(遺命)대로 하였다.”

훈요태조가 죽기 한 달 전에 작성된 것입니다. 태조가 임종 때 박술희에게 부탁한 ‘군국의 일’ 속에는 훈요의 내용도 포함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훈요 마지막에는 “십훈(十訓)의 끝은 ‘중심장지(中心藏之)’라는 네 글자로 맺어져 있는데, 왕위를 잇는 자들이 서로 전하며 보감(寶鑑)으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왕위를 잇는 자들은 훈요의 지침을 항상 마음속에 담고, 그것을 거울삼아 통치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태조가 가장 신임했던 측근 박술희를 내전에 불러 그에게 전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훈요는 모든 백관에게 알리는 공식적인 문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후기의 역사가 이제현훈요십조를 ‘신서십조(信書十條)’라 했습니다(『익재집』 권 9 「충헌왕 세가」). ‘신서(信書)’는 글자 그대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글로서, 본인이 직접 쓴 친서이자 자신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공개할 수 없는 사신(私信)이기도 합니다. 훈요의 특성을 그대로 잘 드러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훈요는 모두에게 공개된 공식 문서라기보다는 국왕이나 그 측근 관료들이 통치의 내부 지침으로 삼아 전해 내려온 문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뒷날 훈요가 왜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었을까요? 역시 당시 최항의 위상과 관련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항은 천추 태후의 수 차례 살해 위협 끝에 마침내 왕위에 오른 현종을 옹립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그는 현종이 즉위한 후 국왕의 스승으로 임명되었으며, 재위 기간 내내 재상으로서 현종을 보좌했던 측근 중의 측근입니다. 따라서 그는 국왕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훈요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그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7대실록』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훈요가 그의 집에서 발견된 것은 그의 지위로 미루어 보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현종 4년 『7대실록』 편찬의 최고 책임자인 감수 국사에 임명되었고, 현종 15년에 사망합니다. 따라서 최제안은 최항 사후에 그의 집에서 훈요를 찾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훈요가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사실이, 훈요가 뒷날 위조되었다는 이른바 위작설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918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으로 위작설을 제기하면서, 바로 이 사실을 유력한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태조 때의 훈요는 전해지지 않고, 현재의 훈요현종 무렵에 최항이 작성했다는 주장입니다. 뒷날 역사가가 최항의 것을 태조의 것으로 잘못 알고 역사책에 기록했다는 것이 위작설의 골자입니다. 최항은 최언휘(崔彦撝)의 손자인데, 최언휘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했고, 귀국 후 신라와 고려에서 문장가로 크게 활약했던 경주 출신의 인물이며, 훈요를 발견한 최제안 역시 경주 출신 최승로의 손자라는 사실을 이마니시 류는 주목합니다. 두 사람 모두 경주 출신의 신라계 인물이기 때문에 백제인을 등용하지 말라는 제8조가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최항은 거란의 침입과 그 위험성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거란을 짐승의 나라로 규정한 제4조를 작성했고, 불교를 혹신하고 팔관회 부활을 주장한 인물이기 때문에 연등회팔관회의 시행을 강조한 제6조가 작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란 때 불타 버린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7대실록』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훈요를 발견한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면, 경주 출신 최항이 백제인을 미워해 훈요를 조작했다는 기록에도 없는 억측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문헌 고등 비판, 즉 실증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일제 관학자의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위작설의 쟁점이 된 제8조를 검토하기로 하겠습니다.

〔사료 1-3-04〕 『고려사』 권 2 세가 태조 26년 4월 조

”여덟째, (가)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의 산과 땅의 형세는 모두 배역(背逆)으로 달리니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王侯) 및 국척(國戚)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

(나) 또 일찍이 관시(官寺; 관청)의 노비와 진역(津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가 권세가에 붙어 신분과 역을 벗어나거나, 혹은 간사하고 교활한 말로 왕후 궁원(王侯宮院)에 아부하여 권력을 농단하고 정사를 어지럽혀 재앙과 변란을 일으킬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양인이라 하더라도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권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啣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灾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위 조항을 편의상 (가)와 (나)의 두 단락으로 나누었습니다. 즉 (나)의 ‘또 일찍이 관시(官寺; 관청)의 노비(奴婢)’ 이하는 앞의 (가) 단락과 다른 내용입니다. 두 단락을 제8조에 함께 넣어 서술한 것은 관리로 등용될 수 없는 대상을 지적하려는 훈요 제8조의 목적 때문입니다. 즉 (가)의 후삼국 통합에 원망을 가진 자나, (나)의 노비나 잡척 출신자의 경우 후에 권력을 남용하거나 국가에 대한 변란을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등용을 금지한다는 취지 때문일 것입니다.

위작설의 중심은 (가) 단락입니다. ‘차현 이남과 공주강 외(밖)’의 지역 출신 인물은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그 지역은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이라는 것이 위작설의 골자입니다. ‘차현 이남과 공주강 외(밖)’를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주장한 것은 그 연원이 오래됩니다. 조선 후기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이마니시 류도 이들의 견해를 바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등용이 금지된 지역을 이같이 보았습니다.

송악 출신인 태조 왕건의 또 다른 지역 기반은 나주 지역입니다. 왕건은 이곳 출신 지방 세력의 협조를 얻어 나주를 점령하면서 후백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궁예 시절에 수상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도 이곳을 정벌한 공로 때문입니다.

태조 왕건의 장남으로 왕위를 이은 혜종의 외가도 나주입니다. 또한 지금의 전라도 일대 출신 인물로서 고려 초기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은 유방헌, 김심언, 전공지 등 『고려사』 열전에 실린 인물만 해도 40여 명이나 됩니다. 인종은 지금의 장흥 출신인 정안(定安) 임씨(任氏)를 외척으로 삼을 정도로 고려 중기까지도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의 정계 활동은 활발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훈요 제8조의 위작설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고의 빈약 내지는 부족의 소치입니다. 오히려 훈요 제8조를 재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의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등용이 금지된 인물을 현재의 전라도⋅충청도 출신 인물이 아니라, 후삼국 통합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특히 등용 금지의 근거로 내세운 풍수지리의 배역론은 통합에 원망을 품은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려는 명분에 불과하며, 사실과는 다르다고 해석합니다. 한편 지역을 축소하여 보는 경우에는 통합 전쟁에서 고려 왕조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지역, 구체적으로 지금의 공주, 홍성(당시 운주)과 청주 지역 출신만 등용이 금지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들은 원래 궁예를 지지하던 세력인데, 왕건궁예를 축출하자 반감을 갖고 후백제와 연결하여 통합 전쟁에서 고려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등용이 금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위작설은 지금 학계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거의 부정되고 있지만, 또 다른 문제는 지역 차별이라는 한때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과 결합되어 매우 민감한 정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일반 대중들은 훈요 제8조를 아직도 지역 차별의 역사적 근거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뛰어넘어 훈요의 해석 문제가 정치 사회적 이슈로 대중들에 다가섰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1999년 4월 KBS1 TV에서 방영한 ‘역사 스페셜’에서 80년 만에 다시 훈요의 위작설이 제기되었습니다. 훈요 제8조가 지역 차별의 역사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제작 의도는 당시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로 인해 제8조가 부정되고, 나아가 귀중한 역사 자료인 훈요 자체를 위작으로 결론내려 더 큰 문제를 낳게 한 점입니다.

이 무렵 학계는 훈요의 위작설을 거의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수업 중에 이 프로그램에 대하여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는, 방송에서 제기한 훈요 위작설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 방송을 직접 본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방송 내용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영상 매체의 효력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방송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학생들을 설득하는 데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지역 차별이나 지역 감정의 근거를 없애려는 공영 방송의 노력을 나무랄 수는 없으나, 이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이는, 그야말로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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