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3.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1) 점령 직후 주한 미군 사령부의 신탁 통치안 반대 입장

라. 미군의 남한 진주 과정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하지 중장과 그의 미 육군 24군단(24th Corps)이 상급 부대인 10군(10th Army)과 함께 남한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1945년 8월 11일 저녁이었다. 이 명령을 받았을 때 24군단은 오키나와에서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키나와 주둔 10군과 예하 부대가 남한 점령군으로 선택된 것은 한국에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순전히 물리적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10군 사령관은 스틸웰(Joseph W. Stilwell) 장군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장개석 주석이 스틸웰을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데 극력 반대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하지(Johr R. Hodge)의 24군단이 남조선 점령군으로 선택되었다.

스틸웰 장군

장개석과 스틸웰의 불화는 유명했다. 스틸웰은 중일 전쟁 개전 이래 중국 전구 미군 사령관이자 주 중미 군사 고문단 단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군사 고문단 단장 재임 시절, 중국 국민당 정부와 국부군의 무능과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대일전을 효과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미국이 중국 공산군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장개석은 이런 스틸웰의 태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양자의 불화로 인하여 결국 스틸웰은 1944년에 전출되었고,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이 후임으로 부임했다. 미군은 남한을 점령하면서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항복 접수라는 군사적 목표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점령군 사령관의 선정에서부터 우방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질 정도로 남한 점령은 국제 정치적으로 예민한 성격을 띠었다.

웨드마이어 장군

남조선 점령군으로 선발된 24군단은 1944년 4월 8일 하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하와이에서 창설된 이래,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쌓은 잘 훈련된 전투 부대였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 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지는 ‘군인 중의 군인’(a soldier's soldier)이라는 평판처럼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형 무장이었다. 하지는 ‘무뚝뚝하고 직선적 접근 방식’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군대 경력 이전 하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24군단 공보부가 간행한 그에 대한 소개는 그의 군대 경력만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고, 미국에서 출간된 각종 인명 사전에도 군대 이전의 경력에 대해서는 출생과 학력만 간단히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는 1893년 6월 12일 미국 일리노이(Illinois) 주의 시골 도시 골콘다(Golconda)에서 태어나 일리노이의 농장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1912, 13년 사이에 남 일리노이 사범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17년에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정규 육군 사관 학교(웨스트포인트) 출신은 아니었다. 그는 1917년 5월 쉐리든 요새(Fort Sheridan)에 있는 고등 사관 양성소(Advanced Officers Training School)에 입학함으로써 직업 군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보병 장교로 프랑스 전선에 참전하였고, 1921년에는 미시시피 농과 대학의 군사학 및 전술학 교관이 되었다. 1925년에는 교관직을 떠나 지휘⋅참모 학교(Command and General Staff School)에 입교하였고, 이 학교와 육군 군사 대학(Army War College)을 졸업하였다. 그는 항공대 전술 학교(Air Corps Tactical School)를 졸업한 몇 안 되는 육군 장교였지만 계속 보병으로 복무하였다.

하지는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 이전에는 육군부 참모부에서 5년간 근무하였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였다. 25사단 부사단장으로 과달카날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고, 이 전투 후 진급해 아메리칼 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하지는 부겐빌 전투 당시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다 부상당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뒤 아메리칼 사단을 이끌고 다시 솔로몬 전투에 참전하였다. 솔로몬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유공 훈장(Legion of Merit)과 무공 메달(Distinguished Service Medal)을 받았다. 1944년 4월에 24군단 사령관으로 부임하였고, 마리아나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상륙 작전을 이끌었다. 그의 부대는 레이테와 오키나와 탈환 작전에 참여하였다. 하지는 장병들과 고락을 같이하고 솔선수범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자신의 부대를 정예 전투 부대로 유지함으로써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다.

24군단이 10군을 대신하여 남조선을 점령할 것이라는 소식이 24군단에 전해진 것은 8월 15일이었다. 하지는 8월 19일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사령관 맥아더로부터 한반도 점령 작전 계획을 전달받았고, 그날로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US Army Forces in Korea)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는 작전명 ‘블랙 리스트’를 본 계획으로 하고, 일본 항복 이후의 상황에 맞추어 미군의 한반도 진주를 계획한 작전명 ‘베이커 포티(Baker Forty)’ 계열에 입각해서는 자신의 병력을 38도선 이남으로 이동, 전개시켰다. 이 작전 명령에 따르면 미군의 남조선 점령은 3단계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제1단계는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고, 조선 총독부의 업무를 인계한 다음 맥아더 직속의 남조선 주둔 육⋅해군 지휘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제2단계는 부산을, 제3단계는 전주와 군산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하지는 점령 이외에 점령군의 작전 수행에 방해가 되는 한국인들과 그 조직들에 대한 감시, 육로와 해로의 교통 수단 및 통신 수단의 확보, 그리고 남한 내에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 정부 설치 등의 임무도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괄적인 명령은 하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블랙 리스트와 베이커 포티 계열의 작전 계획은 일본과 한국에 대한 점령의 ‘군사적 측면’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군정 수립 계획과 민정 업무에 관한 원칙은 별도로 마련하여야 했다. 하지가 점령 수행 방법과 절차, 군정 실시 등에 관하여 좀 더 자세한 지시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점령군을 한반도로 신속히 이동시킬 것을 재촉하는 전문이 상부로부터 계속 날아들었다.

24군단의 한반도 진주가 결정되자 미국 정부와 군부는 점령군의 신속한 이동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특히 8월 22일 소련군이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한 이후 빠른 속도로 한반도의 남쪽으로 전진하자, 육군부는 ‘조선으로 신속히 이동해서 시급히 경성(서울)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대통령의 희망이자 지시’임을 강조하는 전문을 거듭해서 보냈다. 상부의 재촉을 받은 맥아더 사령부는 하지에게 이전의 작전 계획을 파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경무장(經武裝) 상태로 신속히 이동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지시는 남진하는 소련에 대비하여 가급적 한반도 북단에서 이익선을 확보하려던 미국 정부와 군부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소련군 만주 점령

한반도로의 신속한 병력 전개를 재촉하는 전문들을 통하여 미국 정부와 군부가 가지고 있던 대소(對蘇) 견제 의식은 하지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하지는 이후 그의 참모들에게 미군의 남조선 점령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소련의 전 한반도 점령을 막기 위하여 남조선을 그 보루(foothold)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미국의 국익에 충실하고 고지식했던 야전 지휘관 하지가 상부의 강한 대소 견제 의식을 전달받으면서 자신의 임무가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익선을 확보하는 것이며, 이는 곧 남조선을 대소 보루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중요한 것은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그가 가질 수 있었던 정치적 입장과 군사 전략적 견해가 한반도 내부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점령 이전부터 일정한 이념적 편향성을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는 점령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와 군정 수립에 대한 상부의 지원을 기대하고 8월 21일 2명의 참모와 함께 마닐라로 향하였으나 별 소득 없이 8월 25일 귀환하였다. 하지는 한반도 내부 정세에 대한 현장 정보를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연락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8월 29일 맥아더 사령부를 경유하여 일본군 사령관이 보낸 조선에 관한 최초의 상황 보고가 하지에게 들어왔다. 또 하지는 독자적으로 조선 주둔 일본군 지휘관과 교신을 시도하여 마침내 8월 31일 일본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와 연락 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미군과 조선 주둔 일본군 사이의 초기 교신은 미군의 한반도 내 정세 인식의 방향을 좌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만큼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미군 진주 이전 일본군이 전문을 통하여 하지에게 전달하려고 애쓴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소련의 38도선 이남으로의 남진 가능성에 대한 우려, ②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군의 존재가 치안과 질서 유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북조선의 비참한 상황이 남조선에까지 확산될 우려가 있음, ③ 상황을 이용해서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들과 독립 선동가들이 조선인 사이에 존재함, ④미군이 조속히 진주해서 질서를 회복하고, 항복 접수와 행정 기구를 이양해 주기 원한다.

일본군의 무선 전문 내용은 첫째, 미국의 대소 경계 의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 둘째, 미국의 대소 경계 의식을 조선 내 정치 정세와 적극적으로 연결시키고, 특히 좌익 세력과 민족 혁명 세력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을 조장하여 이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유도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JANIS 75는 미국에 대한 조선인의 감정이 소련, 중국, 영국 등 다른 어느 열강에 관한 감정보다 우호적이라고 분석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에 불과하였다. 미국 측에서는 종전 직전 조선 각 정치 세력들의 성격을 차별적으로 인식하면서 전후 한반도 정세의 추이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리고 진주 직전 하지가 일본군과 교신했던 무선 전문들은 조선 혁명 세력에 대한 미군의 기피 태도와 적대 의식을 더욱 조장하는 역할을 하였고, 남조선 내부의 혁명적 상황에 대한 미군 측의 우려와 위기 의식을 한껏 부풀려 놓았다.

남조선 점령 지령을 받은 이후 하지는 유능한 군정 요원과 적절하고 구체적인 점령 통치 방침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미국 정부와 맥아더 사령부는 점령지로 신속히 이동할 것을 재촉하였고, 조선 주둔 일본군으로부터 날아오는 남조선 내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불순 분자들의 난동’은 하지의 우려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미국 정부와 맥아더 사령부는 대소 경계 의식을 내비치면서 소련군과 조우했을 때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으므로 하지는 남조선 점령이 미묘하고 예민한 국제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숙지할 수 있었다. 또 조선 총독부와 조선 주둔 일본군이 전문을 통하여 미⋅소의 분할 점령으로 야기된 ‘우려할 만한 상황’을 환기시키고 있었으므로 하지는 미⋅소의 분할 점령이 한국 사회 내부에 미칠 파장에 대해서도 인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의 우려와 이후 한반도에서 겪게 될 그의 운명을 암시라도 하듯 9월 초순 오키나와에는 연일 큰 파도와 강풍이 몰아쳤고, 승선을 기다리던 하지의 군대는 기상 관계로 출발 일을 두 번이나 연기하였다. 9월 4일 바람이 조금 누그러진 틈을 타 하지 일행은 마침내 인천행 수송선에 승선하였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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