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2) 반탁 운동의 격화와 우익 내부의 동향

가. 미 군정, 이승만의 남한 정계 개편 및 우익 세력 통합 구상

미 군정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개막 이전에 국무부를 향하여 신탁 통치 반대 입장을 거듭 밝혔고, 정무 위원회안과 같이 국무부의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을 대체할 독자적인 과도 정부 구상을 수립하였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국무부는 소련과의 협상 이전에 정무 위원회와 같이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대표 기구를 설치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다가오자 오히려 한국인들의 반탁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보다 대표성을 갖춘 기구를 설치함으로써 국무부의 신탁 통치안을 거부할 수 있는 실질적 근거를 확보하려 하였다. 미 군정의 의도를 실현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맡은 것이 이승만과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이하 독촉 중협)였다. 12월 15일, 16일에 개최된 아래의 독촉중협 중앙 집행 위원회 회의록의 내용은 당시 미 군정 구상의 일단과 이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을 잘 보여 준다. 1)

〔사료 4-1-01〕 12월 15일, 16일에 개최된 아래의 독촉중협 중앙 집행 위원회 회의록

① 각 단체의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정치 지도자의 합동 회의체를 구성하여 민의(民意) 대표 기관 설치.

② 이 가운데 15인 이내의 최고 지도자로 국정 회의(국무 회의)를 구성(최고 지도자로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유동설(柳東說), 송진우(宋鎭禹), 안재홍(安在鴻), 여운형(呂運亨), 박헌영(朴憲永) 또는 김철수(金綴洙)를 예상). 이 기구는 한국인 최고 기관으로 군정청과 연락을 담당.

③ 이 기구의 성격은 군정에 대한 자문 기관이자 민의 대표 의결 기관. 점차 군정청으로부터 행정권을 위양받아 정부 권한을 행사.

위의 인용은 1945년 12월 15일과 16일의 독촉중협 중앙 집행 위원회 회의록 가운데 정부 수립 경로와 관련된 논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들 회의에서 정부 수립 논의를 주도한 것은 이승만, 장덕수(張德秀), 허정(許政) 등으로 주로 이승만⋅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요점은 독촉중협을 임정과 통합시켜 점차 군정하의 과도 정부로 발전시킨다는 것이었고, 위의 요약은 그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독촉중협 중앙 집행 위원회를 합동 회의체이자 민의 대표 기관으로 상정하였고,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미 군정이 임정의 정부 자격을 부인하므로 정부 수립을 독촉중협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이 회의에서 이승만은 미 군정이 자신에게 대표 기관의 설치를 요청하였으며, 양 일간 회의에서 이승만은 12월 15일이 정치적 대표체 결성의 시한으로 미 군정이 제안한 마지막 날이라며, 대표 기관 설치의 시기적 절박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12월 16일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개최 예정일로 미 군정이 제시한 날짜는 여기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발언은 그의 구상과 의도를 잘 보여 주며, 또 그가 강조하듯 이 계획이 미 군정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군정 장관 아놀드가 이 고문 제도(顧問制度)를 군정의 부속물로 삼으려 하였지만 자신이 반대하여 군 정부와 연락하는 국정 회의(國政會議)로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발언은 그의 이중 화술(Double-Speaking)을 보여 주는 것으로, 회의 참여자들에게 독촉중협을 모태로 수립될 한국인 대표 기관의 위상 제고가 그의 노력 덕분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위의 회의록에 나타난 과도 정부 수립 방안은 사실은 내용적으로 미 군정이 그 이전 단계에서 구상하였던 정무 위원회 수립 경로나 뒤에서 분석할 미소 공위 미국 대표단의 임시 정부 수립 방안과 매우 유사하다. 장차 정부로 발전할 ‘국정 회의(국무 회의)’는 미소 공위 미국 대표단이 임시 정부의 모태로 생각했던 국무 회의(Council of State)와 명칭마저 동일하다.

미 군정과 이승만⋅한민당 진영은 어떻게 하든지 임정과 독촉중협의 관계를 조절함으로써 민의 대표 기관을 설치하고자 하였지만 이러한 계획은 예상했던 것처럼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독촉중협의 정치적 대표성 확보, 임정과의 관계 조절 모두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독촉중협은 처음에는 초당파적 통일 기구를 표방하고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결성 초기에는 조선 공산당, 인민당 등도 참여하였지만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소⋅반공 태도의 표방으로 공산당, 인민당 등 좌파 계열은 점차 탈퇴하였다. 독촉중협은 중앙 집행 위원회가 개최된 12월 중순의 시점에는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보수 진영 일부의 대표라는 위상밖에 확보하지 못하였다.

송진우

또 독촉중협은 내부적으로 임정과의 관계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우익 진영은 그때까지 임정 봉대론(臨政奉戴論)을 정치적 존립 근거의 하나로 내걸고 있었다. 따라서 임정이 자신들의 법통성을 고집하는 한 이러한 미 군정 승인하의 과도 정권 수립 계획을 임정의 법통성과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는 문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의 회의 참석자 가운데에서도 이갑성(李甲成), 원세훈(元世勳) 등은 독촉중협으로 하여금 미 군정과의 관계를 맡게 하고, 임정임정대로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 회의는 이승만에게 김구, 임정 측과의 절충을 위임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승만⋅한민당 계열은 독촉중협을 매개로 사실상 임정의 법통성을 부인하고 정부 수립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위의 독촉중협 중앙 집행 위원회 회의에서 이승만은 미 군정이 임정의 정부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임정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최고 고문으로 받아들이고, 독촉중협을 정부 조직체로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주장은 이승만의 정치적 야망을 나타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 군정의 의도를 대변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시점에서 미 군정의 우익 중심 정계 통합 의도를 관철시키는데 있어서의 최대 현안은 임정으로 하여금 법통론을 철회시키고, 대신에 임정 요인과 국내 각 정당⋅단체의 대표들을 망라한 정치적 통합 기구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장덕수
허정

미 군정의 계획은 임정 측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승만은 과도 정부 조직의 절박성, 미 군정의 자신들에 대한 신임 등을 강조하면서 임정 측과 절충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임정은 독촉중협과의 통합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성주식(成周寔)⋅장건상(張建相) 등은 임정과 독촉중협의 관계를 부인하기까지 하였다. 오히려 임정은 12월 하순에 들어 민족 통일의 최고 기관을 자처하는 특별 정치 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를 발족시킴으로써 독촉중협과는 별개로 임정의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수립하였다.

미 군정의 정계 개편 구상과 반탁을 표방하는 민의 대표 기관 설치 기도, 미 군정의 의도를 실어 나르던 이승만의 시도는 1945년 12월에는 실현될 수 없었으며, 신탁 통치 파동이 휩쓸고 지나간 1946년 2월에야 민주 의원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 막간극으로 반탁 운동을 등에 업은 임정의 정부 수립 운동과 이를 ‘쿠데타’로 간주한 미 군정의 진압이 있었다.

1)양일간 참석한 위원들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李承晩), 안재홍(安在鴻), 엄우룡(嚴雨龍), 이의식(李義植), 박용희(朴容羲), 백남훈(白南薰), 송진우(宋鎭禹), 허정(許政), 원세훈(元世勳), 이갑성(李甲成), 유석현(劉錫鉉), 손재기(孫在基), 이응진(李應辰), 김법린(金法麟), 김창엽(金昌燁), 황신덕(黃信德), 김석황(金錫璜), 변홍규(卞鴻圭), 남상철(南相喆)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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