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4. 신라의 건국 신화 및 시조 전승 읽기1) 신라의 시조 전승과 내용 구성

가. 혁거세 신화

신라의 건국 신화는 박혁거세(朴赫居世) 신화이다. 그런데 건국시조인 박혁거세 외에도 석(昔)씨와 김(金)씨의 시조로서 석탈해(昔脫解)와 김알지(金閼智)에 대한 신화도 함께 전해진다. 석탈해와 김알지 신화는 그 자체로서는 건국 신화라고 할 수 없지만, 이 두 신화 역시 왕실의 시조 신화로서의 위상을 지니므로 함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건국 신화 외에 또 다른 왕실의 시조 신화가 존재한다는 점이 고구려나 백제, 가야의 건국 신화와는 차별되는 신라 건국기 신화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 건국 신화도 그렇지만, 건국 신화에는 신라의 국가 성립 및 그 이후의 정치적 성장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 3개의 왕실 시조 신화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라에서 박⋅석⋅김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했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건국 신화이자 박씨 왕실의 시조 신화이기도 한 박혁거세 신화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혁거세 신화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그리 다르지 않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전하는 내용부터 살펴보자.

▣ 『삼국사기』 신라 본기 소재 혁거세 신화

〔사료 4-1-01〕 『삼국사기』 권 1 신라 본기 박혁거세

(가) 시조는 성(姓)이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서기전 57)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가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나)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또는 간진촌(干珍村)),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辰言]로 왕 혹은 존귀한 사람을 뜻한다.

(라) 5년(기원전 53) 봄 정월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어떤 할멈[老嫗]이 보고서 이상히 여겨 거두어 키웠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그의 이름을 지었는데,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다. 시조가 이를 듣고서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행실이 어질고 안에서 보필을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두 성인[二聖]이라 일컬었다.

(마) 8년(기원전 50)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거룩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되돌아갔다.

17년(기원전 41)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19년(기원전 39)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21년(기원전 37) 서울[京]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26년(기원전 32) 봄 정월에 금성(金城)에 궁실을 지었다.

30년(기원전 28) 낙랑인(樂浪人)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변경 사람들이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 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38년(기원전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면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워,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 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해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39년(기원전 19)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며 말하였다.

“서한(西韓)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喪)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53년(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61년(서기 4) 봄 3월에 거서간이 죽었다[昇遐].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가)는 1대 왕 박혁거세에 대한 첫머리의 기술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본기 체제에 따라 기술한 것으로 건국 신화의 내용은 다음 (나)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신라 6촌6촌장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삼국유사혁거세 조에 전하는 박혁거세 신화 첫머리에도 6촌장이 등장한다. 다만 차이점은 촌장의 이름, 처음에 내려온 산 이름, 그리고 6촌6부의 관계에 대한 기술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이들 6촌장 세력은 박혁거세 집단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경주 지역에 터전을 마련하고 있던 재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이 조선의 유민들이라고 밝히고 있어,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하하여 경주 지역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 부분이 진정한 의미에서 박혁거세 신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이 바라본 양산은 지금 경주의 남산이다. 이 남산은 일찍부터 신라인들에게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신성한 우물이 있는데 바로 위의 신화에 나오는 나정(蘿井)이다. 즉 양산과 나정은 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서, 이곳이 매우 신성한 지역으로 숭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일 불교가 들어온 뒤에는 신성한 이 양산 지역이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지금 경주의 남산에 수많은 불교 유적들이 남아 있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박혁거세 신화의 주요 모티브는 모두 세 가지이다. 첫째는 탄강지로서 양산의 우물과 숲, 둘째는 혁거세의 등장을 알리는 신성한 말, 셋째는 혁거세가 태어난 알 등이다. 이 중 첫째인 박혁거세의 탄강지인 양산의 우물과 그 옆의 숲은, 고대 사회의 신앙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정천(井泉) 신앙과 수목(樹木) 신앙을 반영한다. 정천 신앙, 즉 우물에 대한 신앙은 생명의 기원으로서 물에 대한 신앙과 통하는 것이며, 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도 알영정(閼英井)에서 태어남으로써 공통된 정천 신앙을 보여 준다. 고구려의 주몽 신화에서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곤연(鯤淵)의 큰 돌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전승도 정천 신앙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또 고구려 말기의 집권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시조가 우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씨를 연(淵) 혹은 천(泉)으로 하였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경주 나정
나정은 오릉(五陵) 남동쪽 소나무숲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팔각 건물지, 우물지 등이 남아 있다. 최근의 발굴 결과 확인된 팔각 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 터로 추정된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나정 비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나정 석재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오릉 숭덕전
알영정으로 알려진 우물이 오릉[新羅五陵] 내 숭덕전(崇德殿) 뒤편 대나무숲 속에 있다. 우물 위에 길이 2m 정도의 석재 3매가 덮여 있고, 그 옆에 알영의 유허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천마도 장니(天馬圖障泥)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나정 옆의 숲은 수목 신앙과 연결되는 곳으로 단군 신화의 신단수는 물론, 신라의 신화로서는 김알지의 탄강지인 계림(鷄林)도 이와 연결된다. 즉 천신이 강림할 때 산의 나무를 통해 내려오는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수목 신앙은 만주와 한반도 주민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고대 신앙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둘째, 말의 등장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박혁거세 신화에는 흰 말[白馬]로 기록되어 있다. 고대 신화에서 흰색은 그 자체가 신성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삼국유사』의 신화처럼 백마가 본래 신화의 원형에 가까울 것이다. 혁거세의 등장을 알리는 이 흰 말은 아마도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역시 신라인들이 백마를 숭배하였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최근에는 천마도가 말이 아니라 기린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주변 여러 나라의 예를 보아 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말을 일종의 토템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유사』의 박혁거세 신화에서는 “말이 길게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천상적 존재임이 드러나며, 따라서 이 말을 토템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이 말을 매개로 비로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된다. 즉 박혁거세 신화가 천강(天降) 신화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신화의 주인공인 큰 알과 여기서 태어난 혁거세의 존재이다. 즉 난생(卵生) 신화의 모티브이다. 난생 신화라는 요소는 주몽 신화나 가야의 김수로왕 신화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박혁거세로 대표되는 집단이 천손족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위 신화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박혁거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주된 이유가 신이한 탄생이라고 할 때, 천강이라는 점이 주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박혁거세 신화는 천강과 난생이라는 한국 고대 건국 신화의 주요 모티브를 모두 갖추게 되는 셈이다.

(라)는 박혁거세의 왕비로 알영(閼英)의 탄생을 보여 준다. 사실 박혁거세 신화는 알영의 탄생과 신성한 혼인으로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알영이 알영정에서 용의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는 신이함이 혁거세와는 좀 다른 모습이다. 용은 물과 연관되는 신이한 존재이다. 알영이 왕비가 된 후 혁거세 17년에 왕이 6부를 순행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랐으며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땅의 이로움을 다하도록 하였다는 기사를 보면, 알영이 지모신(地母神)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와 알영의 신화는 단군 신화나 주몽 신화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단군과 주몽은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天神)과 땅의 지모 신(地母神)의이 결합하여 태어난 인물이다. 그래서 이들은 신성한 혼인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박혁거세는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되며, 그래서 그는 지모 신인 알영과 결합하게 되는 식으로 신화가 구성된다. 이러한 성격은 가야의 수로 신화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김수로와 허황옥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수로 신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마)는 혁거세가 즉위한 이후의 신라 본기에 기록된 기사 중에서 박혁거세의 신이한 덕성을 드러내는 기사만을 골라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 기사를 덧붙여 정리한 이유는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신라의 주변 국가, 즉 왜인과 변한⋅낙랑⋅마한⋅동옥저 등과의 관계가 변화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들이 당시 신라인들이 박혁거세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잘 보여 주기 때문에, 건국 신화의 일부 내용으로 구성하여도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면 『삼국유사』에 전하는 박혁거세 신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삼국유사』 소재 혁거세 신화

〔사료 4-1-02〕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가)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이 있었다. 하나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촌장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이니,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이니,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니,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며, 본피부(本彼部)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里村)이니 촌장은 지타(祗沱)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며,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裵)씨의 조상이 되었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니, 촌장은 호진(虎珍)이라 하고,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며, 습비부(習比部)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나) 전한 지절(地節) 원년(69년) 임자(壬子) 3월 초하룻날에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빛처럼 땅에 드리우고 있었다. 거기에는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그곳을 살펴보니 붉은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고 어린 남자아이를 얻었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이윽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이에 혁거세왕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왕의 칭호를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다.

(다) 이때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제 하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자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어린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얼굴과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의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졌다. 그래서 그 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라) 궁실(宮室)을 남산 서쪽에 짓고는 두 명의 신성한 아이를 모셔다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알은 박과 같이 생겼다. 사람들은 박을 박(朴)이라 하므로 성을 박(朴)으로 삼았다. 계집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된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 하였다.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으며,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하였으니 계룡(鷄龍)이 상서로움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에 김알지(金閼智)를 얻었는데,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고 한다. 후세에 와서야 신라라는 나라 이름을 정하였다.

(마)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다.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쳐 장사 지내려 했더니 큰 뱀이 나타나 내쫓아 못 하게 하므로, 다섯 몸뚱이를 각각 나누어 장사 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으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월성 전경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월성 동축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삼국유사』에 전하는 박혁거세 신화는 『삼국사기』의 그것과 상당 부분 일치하면서도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아마도 이 두 역사책은 서로 인용한 전거 자료가 달랐던 것 같다. 앞서 『삼국사기』의 박혁거세 신화를 살펴볼 때 일부를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검토하면서 그 차이점에 대하여 보다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가) 부분은 6촌6촌장 및 그 내력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술보다는 매우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데, 촌장의 이름과 처음에 내려온 산 이름, 그리고 6촌6부의 관계에 대한 기술이 덧붙여져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6촌의 시조들 역시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왔다는 천강 신화적 내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혁거세와 다른 점은 난생의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6촌의 시조 역시 천강 신화를 갖고 있는 천손족이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조선의 유민으로서 이주민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 6촌이 사로국을 구성하는 연맹 세력이었다.

(나) 부분은 박혁거세의 탄강과 왕의 즉위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그것과는 달리 6부의 조상들이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 왕을 추대하자는 논의를 한다는 점이다. 박혁거세가 등장하여 왕으로 즉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상 『삼국사기』보다는 신화적인 내용이 보다 짜임새가 있고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박혁거세가 등장하는 과정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선 소벌공 혼자서 그 등장 과정을 본 것이 아니라 6촌의 촌장과 자제들이 모두 혁거세 등장의 목격자가 됨으로써 훨씬 극적인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말도 흰 말[白馬]로 표현되고, 알도 붉은 빛으로 묘사된다. 또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동천에서 목욕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는 등 훨씬 신이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다)는 왕비인 알영의 탄생을 기술하고 있다. 계룡에게서 태어난 점, 입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의 북천에서 목욕을 시켜 부리가 빠지게 했다는 점 등이 차이점이다. 이 역시 『삼국유사』의 기록이 보다 신이한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라)는 혁거세와 알영이 왕과 왕후로 즉위하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에는 13세에 이르러 혁거세가 왕위에 오르고, 즉위한 지 5년 만에 알영이 탄강하여 왕비가 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데 반하여, 『삼국유사』에서는 이 두 사람이 동일한 해에 태어나, 13세에 함께 왕과 왕후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물론 『삼국사기』의 혁거세 즉위 5년을 알영의 탄생이 아니라 왕후로 맞아들인 해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영이 왕후가 된 해에 대해서 두 기록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마)는 혁거세의 죽음이다. 『삼국사기』에는 단순히 왕의 죽음과 사릉(蛇陵)에 장사 지낸 기록만을 남기고 있는 데 반하여, 『삼국유사』에서는 신이한 죽음을 보여 준다. 즉 혁거세는 죽어서 하늘로 올라갔으며, 7일 후에 유체가 땅에 떨어지고 왕비도 죽었다. 이러한 죽음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이함을 보여 준다 하겠다. 그러나 장사를 지낼 때 큰 뱀이 등장하고 다섯으로 나뉜 유체를 따로 장사 지냈다는 내용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이를 오릉 혹은 사릉이라고 하는데, 현재 이 오릉은 박혁거세, 알영,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묘로 보고 있다.

오릉 원경(1)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오릉 원경(2)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오릉 전경
오릉은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제2대 남해 차차웅, 제3대 유리 이사금, 파사 이사금 등 5인의 능이라 전한다. 또 일명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박혁거세의 제사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 권 32 제사 지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주목된다.

〔사료 4-1-03〕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제사

제2대 남해왕(南解王) 3년 봄에 처음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묘당을 세웠다. 사계절로 제사지내고 친누이 아로(阿老)로써 제사(祭祀)를 주관하였다.

혁거세 시조 묘는 신라의 국가 제사로서 가장 중요한 제사였으며, 역대 왕의 즉위 의례도 시조 묘에서 거행하였다. 이 시조 묘 제사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단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조 묘의 제사를 친누이 아노가 맡았다는 점에서 여성 사제의 역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노는 아마도 어머니인 알영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이 알영과 아노라는 두 여성을 통해 신라 사회에서 여성 사제가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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