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5. 가야의 건국 설화 읽기1) 김수로왕 신화의 전승과 성립

라. 김수로왕 신화의 성립

▣ 수로왕 신화는 언제 형성되었을까

「가락국기」에 전하는 수로 신화는 천강, 난생, 혼인, 통치와 죽음 등, 다양한 신화적 요소를 골고루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건국 신화보다도 완성도가 높으며 풍부한 서사적 내용을 보여 준다. 바로 이 점에서 수로 신화에는 후대의 가필과 윤색이 거듭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즉 다양한 전승들을 끌어모아 형성된 수로왕 신화는 수로를 신성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수로 신화의 정리 과정과 그 변형의 면모를 잘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현재 김수로 신화를 전하는 문헌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로, 이는 고려 문종 대에 정리된 것이다. 일연이 정리한 현재의 「가락국기」는 본래의 「가락국기」를 간략히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가락국기」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물론 문종 대의 「가락국기」 또한 그 이전의 자료를 참조하여 정리된 것이다. 현재 알 수 있는 수로왕 신화와 관련된 자료는 「고기(古記)」, 『개황력(開皇曆)』,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 김유신의 현손(玄孫)인 김장청(金長淸)이 편찬한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 10권, 「김유신비문」 등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비문」과 김장청이 편찬한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을 참조하여 서술하였다. 「김유신비문」은 문무왕 13년(673)에 김유신이 죽은 뒤에 만들었을 것이며, 「김유신행록」은 8세기 말엽에 씌어진 책이다. 「김유신행록」 이전의 기록이 『개황력(록)』이다. 『개황력』은 『삼국유사』의 왕력(王曆)과 「가락국기」의 거증왕(居登王) 및 멸망 기사에 인용되고 있다.

이 『개황력』은 삼국 시대 말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며, 그 유력한 시기는 신라 문무왕 대로 본다. 왜냐하면 이때는 신라 삼국 통일의 업적을 이룬 김유신(金庾信) 및 그의 동생으로서 태종무열왕의 비이자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명왕후(文明王后) 등 가야 김씨 가문이 최고의 정치적 입지를 갖추고 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에는 금관가야 지역에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 무렵에 수로 신화를 비롯하여 가락국의 역사를 재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개황록』의 편찬 시기에 대해서는 문무왕 대(代)설 외에 수나라의 개황 연간(581~600)설, 나말 여초설 등이 있다. 개황 연간설은 ‘개황’이라는 책이름에 근거하여 신라와 백제의 역사서 편찬이 6세기에 본격화되므로 가락국의 역사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물론 가락국 역사의 정리는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알 수 있는 수로 신화의 형태로 완성된 것은 이보다 늦은 시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개황력』에는 “성은 김씨인데, 대개 이 나라 시조가 금알에서 태어났으므로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있다. 즉 『개황력』은 성씨를 통한 계보 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김유신 가문의 성씨 의식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황력』은 늦어도 가야계 ’김씨’의 성씨 의식이 정리되는 문무왕 대에는 기술되었을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료 5-1-05〕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신라의 제30대 왕 법민(法敏; 문무왕)이 용삭(龍朔) 원년 신유년(661) 3월에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가야국(伽耶國) 원군(元君)의 9대손인 구형왕(仇衝王)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곧 나를 낳았다. 이런 연유로 원군은 나에게 15대 시조가 된다. 그분이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으나 그분을 장사 지낸 능묘는 지금도 그대로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 지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즉 이 글에서 문무왕은 자신으로부터 수로왕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의식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가야 왕계가 정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계보는 현재 「가락국기」에 전해지는 바로 그 계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가락국기」의 내용은 가야계 김씨 집단이 신라 사회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신성화하고 그들의 현실적⋅정치적 위상을 강화할 목적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로 신화의 모든 내용이 통일기 무렵에 완성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수로 신화에는 9간의 등장, 구지가, 천강과 난생의 모티브 등 고대의 신화적 요소들이 매우 풍부하다. 이러한 신화적 요소들은 일찍이 가락국이 등장하면서부터 이 지역에 전승되어 왔을 것이며, 이러한 건국 신화는 아마도 금관가야가 멸망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전승이 단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7세기 통일기 무렵에 이르러 가야계 김씨 세력이 신라 사회 내에서 세력을 키우고, 성씨를 취득하게 됨으로써 가락국의 역사와 왕력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개황력』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렇게 신라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게 된 가야계 세력에 의하여 재정리된 수로 신화에는 신라 건국 신화의 요소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국왕과 중앙 귀족 중심의 집권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면, 각각의 귀족 가문은 자신의 시조를 하늘이나 천제(天帝)와 직접 연결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왕실 시조와의 긴밀한 관계를 내세우는 형태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귀족 세력은 자신들의 시조 전승을 왕실 시조 전승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전승의 골격 일부를 남기는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에도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세력 기반도 어느 정도 유지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국왕 세력은 왕실 시조만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신성성을 확보함으로써 왕권의 초월성을 인정받는 한편, 각 귀족들을 통솔하는 관념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에 고대 국가 발전기에는 귀족 가문의 시조 전승이 왕실의 시조 전승으로 편입되고는 했던 것이다.

김해 김씨 가문의 수로왕 신화도 과거 가야국의 건국 신화이기 에 독자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 전승으로부터 다양한 전승을 차용하거나 연관 관계를 높이는 형태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김수로왕 신화의 내용에 신라의 건국 신화와 유사한 측면이 담겨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김수로왕 신화는 김알지 신화와 유사한 면이 적지 않다. 예컨대 수로가 천강할 때 나타나는 금궤 모티브나 금알[金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한다는 것도 김알지 신화와 유사하다. 김알지 신화의 자줏빛 구름이 수로 신화에서 자줏빛 줄로 구체화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수로 신화의 이러한 부분은 아마도 김알지 신화와 연관되어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위와 같은 추정에 따라 수로 신화에 김알지 신화의 요소가 부가된 것이라면 수로 신화의 본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 권 3 탑상(塔像)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사료 5-1-06〕 『삼국유사』 권 3 탑상(塔像) 어산불영(魚山佛影) 조

옛날 하늘의 알이 해변에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분이 곧 수로왕이다.

위의 수로왕 신화는 바닷가로의 천강 신화적 면모와 난생 신화적 면모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어쩌면 본래의 수로왕 신화는 이러한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현재 「가락국기」에 전하는 수로왕 신화는 난생 요소를 지니고 있되, 황금궤 안에 알이 있다는 점에서는 황금궤와 난생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면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신라 김알지 신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 박혁거세 신화의 6촌장의 존재와 가야 수로 신화의 9간의 모습이 매우 유사한 점도 이러한 측면에서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수로 신화에 등장하는 탈해 관련 전승 역시 7세기에 수로 신화가 재정리되면서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건국 신화 이외에도 『삼국사기』 신라 본기 파사 이사금 23년(102) 조에도 수로왕이 등장하고 있다.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료 5-1-07〕 『삼국유사』 신라 본기 파사 이사금 23년(102) 조

음즙벌 국(音汁伐國)과 실직곡 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 하고는,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 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써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는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 국의 우두머리 타추간(陁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陁鄒)가 보내 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 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수로왕이 당시 실제로 신라 왕과 교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이야기 역시 7세기 무렵 신라와 수로왕과의 관련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볼 때 수로 신화에 신라의 건국 신화적 요소가 포함된 「가락국기」 수로 신화의 형성은, 수로를 조상신으로 하는 가야계 김씨 세력에 의해 재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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