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1) 대한제국의 모색

나. 정국 변화의 계기 - 을미의병과 아관파천

1895년 9월 18일 충청남도 유성에서 문석봉 의병이 봉기하였고, 12월 31일 경기도 이천에서 김하락 의병이 봉기하였다. 1896년 1월부터 경기, 충청, 강원도 등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춘천의 이소응 의병을 비롯하여 원주, 제천, 영월,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호좌의진, 경상도 산청의 곽종석 의병, 나주의 기우만 의병 등이 잇달았다. 이들 의병들은 단발령을 발포한 친일 정부를 타도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사료 2-1-02〕이소응, 팔도에 고하노라!

“지금 왜노(倭奴)가 창궐하고 국내에 적신(賊臣)이 그들에게 붙어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의 모발을 강제로 자르기까지 하며, 만백성을 모아서 개와 양의 무리 속에 빠트리게 하며, 요순과 공자, 주자의 도를 쓸어 없애려 하니, 황천의 상제는 위에서 진노하시고 온 군대와 백성들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로 생각한다. 무릇 나라 곳곳에서 봉기하는 충의의 장수들은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며 국가를 위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을 가장 큰 대의로 삼아야 한다. 의병이 이르는 각 읍과 영(營)의 장관으로서 만일 자기 일신의 편안함을 생각하여 관망하며 바로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들은 모두 이적과 금수의 앞잡이요, 난신적자의 도당이니, 단연 군율을 시행하여 먼저 목을 베고 차후에 보고할 것이다.”

(출전 : 이소응, 『습재집』 권33, 잡저, 「격고팔도(檄告八道)」, 4쪽)

[사료 설명 : 1896년 1월 1일(음력 11월 17일)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유중교, 유홍석, 이소응 등 주요 유생들은 춘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일어난 의병들은 당시 명망이 높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사료 2-1-03〕유인석, 세상에 임하는 세 가지 방책

커다란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비로서 처신할 길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거의소청(擧義掃淸)]이요, 둘째는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대의를 지키는 것[거이수지(去而守之)]이요, 셋째는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깨끗하게 지키는 것[자정(自靖)]이니, 각자가 자기의 뜻대로 쫓아서 할 것이다.

(출전 : 이정규, 「종의록」『독립운동사자료집』1, 619쪽)

[사료 설명 : 유인석(1842~1915)은 제천에서 대규모 강회를 계속하면서 화이관에 입각한 존왕양이와 의리로 문도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향후 시국에 대한 현실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는 유림의 대응책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사료 2-1-04〕유인석, 다시 여러 관리에게 보내는 글

“국경을 넘으며 고국을 돌아보니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고, 또 차마 그간 여러분에게 바라던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 이에 피로써 글을 올립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지난 일을 거울삼아 마음을 고쳐 자기 몸보다 임금을 우선하고 집보다 나라를 우선하고 원수를 토벌하고 오랑캐를 응징하십시오. 그리하여 천지의 경상(經常)을 부지하고 종묘사직의 전형(典型)을 회복시켜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출전 : 유인석, 「재격백관문」, 『소의신편』권1, 81쪽)

[사료 설명 : 1896년 2월 7일(음력 12월 24일) 영월에서 유인석의병대장으로 하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이 새롭게 출범하였다. 호좌의진에는 안승우가 영서 지역을 돌면서 모집했던 의병과, 영남으로 내려갔던 서상렬⋅이춘영의 부대, 그리고 신지수가 모집한 의병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평창, 영월, 정선, 충주, 진천, 단양, 영춘, 지평, 원주, 괴산, 제천, 청풍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충주성 전투와 제천 전투를 치렀다. 1896년 6월 16일 유인석은 제천의 장기렴 군대가 강천과 안창으로 병력을 나누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정선을 거쳐 북상하여 만주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유인석 의병부대의 북상으로 인하여 약 6개월 동안 원주⋅제천⋅충주 일대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의병전쟁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유인석은 1896년 8월 28일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런 상황에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친위대 병력이 서울에서 빠져나가자 고종은 더 이상 일본의 영향 하에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옮겼다(아관파천, 1896.2.11).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가자마자 고종은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 법부대신 장박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잡아 죽이라고 명하였다. 또한 고종은 돌연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윤음을 내렸다.

유길준 등을 체포하라고 명함
출처: 『고종실록』 1896년(고종 33) 2월 11일 기사

〔사료 2-1-05〕고종, 백성에게 내리는 윤음

“아! 임금은 백성의 표준이니 임금이 아니면 백성들이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임금은 일거동(一擧動)을 백성들에게 명백히 보이는 것이 귀중하다. 그저께 일은 아직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의 우두머리와 반역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의 진상이 숨길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을 막고 승복시키는 방도가 혹 허술할까 걱정하여 외국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규례로 임시방편책을 써서 짐이 왕태자(王太子)를 데리고 대정동(大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주관(公使駐館)에 잠시 가 있은 뒤에 왕태후(王太后)는 왕태자비(王太子妃)를 데리고 경운궁(慶運宮)으로 갔으며 짐은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모든 범인을 잡게 하고 그들이 묶은 다음에 곧 돌아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범인을 묶을 때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켜 갑자기 범인들을 살해하고 나머지 범인은 모두 다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쳐버리니 군중의 심리가 더욱 흉흉하여 안정되지 않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짐이 있는 곳을 너희 백성들에게 명백히 알릴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대궐이 무사하고 민심이 여느 때와 같게 되었으니 짐이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기는 바이다. 며칠 안으로 장차 대궐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명백히 알리니 너희들 백성들은 각각 의심을 풀고 생업에 안착하라.”

(출전 : 『고종실록』 1896년 2월 13일)

당시 김홍집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주 권고를 받았지만, “내가 재상이었으니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또 간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하면서 마침내 체포되었다. 1) 이후 김홍집은 경무청 문 앞에서 정병하와 함께 경관들에게 칼로 참살되었다. 버려진 시신은 광화문과 종로거리에서 흥분한 사람들에게 능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어윤중도 고향으로 피신하는 도중 피살되었지만, 유길준, 장박, 조희연 등 갑오개혁 관료 중 일부는 급거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 내각이 붕괴하고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새로 들어섰다.

고종아관파천 직후 민심 수습을 위해 2월 18일 단발을 개인 의사에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으며, 각지 의병에게 즉시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다. 각지에서 회유와 진압이 거듭되는 가운데 8월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는 의병 부대인 호좌의진(湖左義陣)이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이렇게 사회가 점차 안정화되면서 양반 관료 지식층 일각에서는 친일세력의 처단과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서 국면 전환을 촉구하였다. 고종은 비록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갑오개혁에서 추진된 급진적인 개혁으로 인한 후유증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이 회복되자 고종은 국왕인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개혁에 착수하였다.

〔사료 2-1-06〕전 부사(前府使) 이시우(李時宇) 등이 올린 고종 환궁 상소

“아! 요즘 사변이 거듭 생기니 무릇 윤리를 가진 사람치고 누군들 원통하여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을미년(1895) 8월의 화변(禍變) 같은 것은 천하 만고에 없던 일입니다. 폐하가 외국 공사관으로 옮긴 것은 임시방편책으로 나온 것인데, 먼 이웃의 보호와 각국의 공의(公義)에 의지하여 위험이 바뀌어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폐하께서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먼 나라도 화목하게 지내는 넓은 도량과 큰 덕이 있으셔서 사람들을 감복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궁궐로 돌아오는 것을 지체한다면 나라의 위세가 위태롭고 여러 사람의 정서가 울적하니 돌아오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물며 외국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이웃 나라의 상인들이 도성에 가게를 차려 놓은 것은 사실 공법(公法)이 불허하는 바이며 만국에 없는 일입니다. 강한 것을 믿고 약한 것을 업신여기면서 권리를 침탈하여 앞에서는 화란(禍亂)이 자라나고 뒤에는 함정이 파여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만약 줄곧 내버려 둔다면, 신은 국모의 원수를 갚을 날이 없고 대궐로 빨리 돌아올 기약이 없으며 지방의 비적들로 인한 환란이 끝내 그칠 날이 없을까 우려됩니다. 지금 공법이 천하에 시행되는 것은 각국의 많은 임금들이 맹약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법을 범하고 시해하여 반역을 한 자와 반역의 괴수로서 해외로 도망친 자를 진실로 한번 단서를 따지면 잡아서 징계하여 처리할 수 있습니다. 군대의 병참이 근거 없이 와서 머물러 있거나, 상인들이 법 밖에서 땅을 차지하여 시장의 가게를 여는 것도 진실로 한번 추궁한다면 예전대로 철수하여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국의 공사는 모두 의리를 지향하고 신의가 돈독합니다. 우리나라의 신민이 피를 머금고 청한다면 어찌 공법과 공의를 무시하고 이웃 나라의 급함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여러 대신들에게 빨리 물어보고 그들로 하여금 각국 공사관에 간절히 의논하도록 해서 곧 담판을 지어, 주둔하고 있는 군사가 제 나라로 철수하게 하고 수도에 있는 상인들을 항구로 이송하며 역적의 우두머리와 반역의 무리들을 모두 잡아서 징계 처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온 나라 사람들의 더 없는 애통을 풀고 한편으로는 폐하가 대궐로 돌아오는 것을 호위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독립하는 기초를 세울 수 있도록 하소서.”

(출전 : 『고종실록』 1896년 8월 4일)

1)대한계년사』, 『매천야록』 1896년 2월조 기사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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