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1) 대한제국의 모색

다. 제도의 개편과 의정부의 설립

1896년 8월 지방제도의 개혁, 9월에는 새로운 호적 작성이 이어졌다. 우선 지방 제도는 갑오개혁 때 개편된 23개 부를 13개 도로 개정하고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시기 8도제에서 경기, 황해,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 전라, 경상, 평안, 함경 등 5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13개도로 만들고, 각 지방 관리의 인원과 경비 등을 자세히 개정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식 지방 제도를 따랐던 23부라는 생소한 제도로 인해 여러 가지 폐단이 나왔으므로, 지방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종전 광역 지방제도로서 8도제로 환원하되 일정 지역으로 나누어 지방 지배의 편리성을 도모한 것이었다.

대한여지도 (13개도 지도)
출처: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또한 1896년 9월에는 호구조사규칙과 호구조사세칙이 공표되어 새로운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호구조사의 특징은 개별 호마다 일정한 양식의 호적표를 작성한 뒤, 면(面) 단위로 책자를 묶어 중앙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자신의 호적에는 호주와 가족 상황을 기록하고 호주의 4대 조상(四祖)만 기록하였으며, 친속이 아닌 더부살이 하는 사람과 가옥의 소유 여부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게 되었다. 이번 호적 조사의 특징은 호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직역 대신에 직업란을 처음으로 설정하였다. 관료의 지위 이름이나 아직 관료가 아닌 사(士), 농업, 장인, 고용 등 다양한 직업을 표시함으로써 종래 사족이나 양반, 상놈이니 하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표시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후 매년 작성된 호적은 중앙 정부에 의해 인민의 사회적 관계가 신분적 차별에서 평등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갑오개혁의 개혁 조치 중 신분제 폐지가 그대로 수용되어 국가의 호적으로서 제도화된 것이었다.

1902년 당시 농민의 호적
전라북도 운봉군 북상면 칠리 갈계동 7통 1호에 거주하던 이용선(41세)의 호적으로 가족 관계, 나이, 재산 규모 등이 기재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또한 고종은 9월 24일 새로 칙령을 내려 갑오개혁의 내각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이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의정부는 국가의 중대사에 관한 의결과 행정의 최고기구로서, 의정부의 대표인 의정과 내부, 외부, 탁지부, 군부, 법부, 학부, 농상공부 등 7부의 대신, 무임소 장관인 찬정 5명과 참찬 1명 등 14명으로 구성되었다.

〔사료 2-1-07〕칙령 제1호, 의정부 관제를 재가하여 반포하다.

의정부관제 : 대군주폐하께서 만기(萬機)를 통령(統領)하사 의정부를 설치하시니라.

제1관, 직원. 의정부는 좌개(左開)한 직원으로 구성함이라. 의정, 내부대신【참정 예겸(例兼)】, 외부대신, 탁지부대신, 군부대신, 법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찬정 5인, 참찬 1인. 의정과 찬정 5인은 칙임이요, 각부 대신은 직권상으로 찬정을 예겸이요, 참찬은 칙임이니......각부 서리대신도 각부 대신과 같이 찬정의 권리를 가짐.

(중략)

제2관, 회의(會議) 제4조, 의정부는 아래의 사항을 의논하여 결정함이라.

  • 1. 법률과 규칙과 제도를 새로 정하는 사항
  • 2. 현행 법률과 규칙과 제도를 폐지 혹 개정하거나 혹은 이의가 있으며 해명하는 사항
  • 3. 외국과 전쟁을 개시하거나 강화하거나 조약을 의정하는 사항
  • 4. 내지에 민란[擾亂]이 있을 때에는 안무(按撫)함을 위하여 특별한 방법을 의정하는 사항
  • 5.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전선과 철로와 광업을 개설하는 사항
  • 6. 1년도 세입, 세출에 예산 및 결산하는 사항
  • 7. 세출 예산 외에 특별히 지출하는 금액을 마련하는 사항
  • 8. 필요한 때에는 조세와 각항 잡세와 혹 관세를 신설하거나 혹 증설하거나 혹 감생(減省)하거나 혹은 폐지하는 사항
  • 9. 현재 예산에 직원 봉급과 혹 기타 금액을 개정하는 사항
  • 10.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사업을 시행하는데 민유의 토지와 삼림 등을 공용(公用)하는 때는 적당한 가액을 보상하는 사항
  • 11. 대군주께서 특명하시어 회의에 부치시는 사항
  • 12. 대군주폐하의 재가를 거친 법률과 장정을 반포하는 사항.

제3관, 주안(奏案) 제4조, 회의에 결정한 의안을 대군주폐하께서 재가하실 성지(聖旨)가 있으시면 가(可)라 한 표제(標題)의 많고 적음에 관계 없이 재가하시는 군권(君權)이 있으시고, 혹 해당 의안에 대하여 토론함이 성의(聖意)에 맞지 않으면 칙교(勅敎)하시어 하여금 다시 토론케 하심이라.”

(출전 : 『고종실록』 1896년 9월 24일)

의정부는 국정의 주요 사항을 의결했는데 법률과 규칙의 제정과 개정 및 폐지, 외국과의 전쟁 개시나 강화 등을 의결하고 내란 대책, 전선과 철도와 광업 개설, 1개년도 세입∙세출의 예산 및 결산, 예산외 지출, 조세 및 각종 잡세∙관세의 신설과 증설 등을 토의하여 결정할 수 있었다. 의정부는 마치 오늘날의 국무회의처럼 상정된 의안에 대하여 토론과 질의⋅응답을 할 수 있었고, 원래의 안건과 개정안 등을 충분히 심사할 수 있었다. 찬성과 반대의 수를 즉시 발표하고 의견을 심사보고서로 별도로 제출할 수 있었다. 또한 의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러 의정부 구성원들의 의견이 같지 않는 경우에는 찬성과 반대의 수, 심사보고서 등을 작성하여 국왕에 보고하는 주본(奏本)에 첨부하였다.

덕수궁 준명당에서 촬영한 고종과 의정부 대신들(1908년)
출처: 문화일보

이렇게 보면 의정부는 마치 국무회의와 국회의 기능을 가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의정부는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하면서 러시아의 국가평의회 제도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1) 사실 법제의 조항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당시 독립 협회도 “의정부 규칙대로 각부 대신과 찬정들은 자기의 의사대로 무슨 일이든지 회의 중에 연설하고 자기 뜻대로 투표할 때에 가부를 말하는 권리가 있으니, 가부를 말하여 그 일이 되고 안 되게 하는 권리가 있은즉,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투표하는 것을 보고 세계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 줄 알 터”라고 하여, 2) 회의 규칙에 따라 다수결에 의해 주요 안건이 결정되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종은 새로운 의정부 제도를 기안하면서 “이번의 제도는 내가 밤낮으로 근심하고 애쓰면서 타당하게 만든 것이니 모든 사람들은 다 잘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이 고심 끝에 겨우 완성한 의정부 제도였다니! 그렇다면 어떻게 고종의 의도대로 의정부가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의정부에서 주요 안건에 대해 다수결에 의해 결정할 때 표제의 찬성수만 표기할 뿐 다수의 결정이나 만장일치의 결정에 따르는 권한을 허용하지 않았다. 안건의 최종 결정권은 고종에게 있었다. 고종은 재가를 받고자 하는 안건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으면 다시 의정부에서 토론하게 할 수 있었고 찬성수에 구애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의정부 대신을 고종 스스로 임명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대신들은 사전에 임명을 취소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의정부에서 의결한 다수는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기 일쑤였고, 간혹 표결이 어긋난 경우도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고종이 최종적으로 개입하여 결정을 뒤바꾸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의정부 회의에서는 각부의 대신들에게 일부 행정적인 기능을 위임하여 정치적인 주요 사안에 대해 각부 대신이 협의할 수 있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 자신의 최종 결정권은 확고히 보장해 놓은 셈이다.

1)『The Independent』, 1896년 9월 26일, 「Government Gazett」
2)독립신문』, 1896년 10월 6일, 「논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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