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4. 대한제국기의 개혁사업3) 산업 진흥 정책과 재정 개혁

나. 서울의 전차 건설

한편 고종 황제는 서울의 전차 건설에 관심을 가져 1898년 한성 전기 회사에 한성 지역의 전차, 전등, 전화 설비의 시설과 운영권을 주었다. 한성 전기 회사는 미국인 콜브란(H.Collbran)과 보스트윅(H. B. Bostwick)과 전차 선로를 부설하기로 하였다. 1898년 9월에 기공하여 1899년 8월 서대문에서 청량리까리 5리의 선로가 준공되었다. 서울에서 전차의 등장은 1899년 경인철도의 개통과 함께 새로운 운송 수단으로 서울 시민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사료 4-3-03〕「전거 규칙」

○ 한성 전거 회사 광고를 좌에 기재하노라.

  • 일(一)은 전거를 타고자 하는 사람은 선로(線路) 각 병문에 서서 기다리다가 수레 오는 것을 보고 운거수(運車手)나 혹 장거수(掌車手)에게 손을 들어서 수레 탈 뜻을 보여 수레 멈춘 후에 탈 일이며,
  • 일은 남녀 노소 귀천이 다 전거를 타되, 다만 5세 이하 아이는 어른을 따라 함께 타거드면 전거표를 의논치 말 일이며,
  • 일은 수레 표를 본회 사무소와 선로 각처에서 팔 터이니 수레 타기 전에 수레표를 살 일이며,
  • 일은 전거를 탄 후에는 전거 표를 장거수에게 내어 주되 그 장거수가 그 표에 구멍 뚫음을 반드시 볼 일이며,
  • 일은 전거 표를 사지 않고 가만히 타는 사람은 장거수가 잡아 경찰 순검에게 보내어 벌금을 물려 받을 일이며,
  • 일은 전거에서 내릴 곳을 장거수에게 미리 분명히 말할 일이며,
  • 일은 전거 탄 사람이 운거수에게 일절 말을 통하지 말아 운거하는 역사에 거리낌을 면케 할 일이며,
  • 일은 전거 타는 사람이 수대(手帒) 외에 다른 물건은 가지지 못할 일이며,
  • 일은 운거하는 시한은 해 뜰 때로부터 해 질 때까지 아직 정할 일이며,
  • 일은 별비(別備) 전거와 혹 여럿이 모여 놀려 하는 전거 세는 본회 사무소로 와서 물음이 가할 일이며,
  • 일은 전거 맡은 인원이 제 직무를 잘 하지 아니하던지 삼가 하지 아니 하는 폐단을 전거 탄 사람이 확실히 보는 대로 본 회사 사무소로 와서 고할 일이라.

경계할 일

  • 일은 전거 운동할 때에는 전거를 타라거나 전거에 내리기를 일절 발생치 말 일이며,
  • 일은 운거수의 안진 앞으로는 일절 타지 말 일이며,
  • 일은 전거 통행한 전선을 일절 만지지 말 일이며,
  • 일은 철도 두 줄 사이와 전거 운동하는 길 앞을 일절 범하여 다니지 말 일이라.

전거 세전 분등

  • 상등은 경교(京橋)서 동대문까지 엽전 닷돈
  •     종로서 동대문까지 엽전 서돈 오푼
  •     경교서 청량리까지 엽전 일곱돈 오푼
  •     동대문서 청량리까지 엽전 닷돈
  • 하등은 경교서 종로까지 엽전 한돈 오푼
  •     경교서 동대문까지 엽전 서돈
  •     경교서 청량리까지 엽전 닷돈
  •     종로서 동대문까지 엽전 한돈 오푼
  •     종로서 청량리까지 엽전 서돈 오푼
  •     동대문서 보제원까지 엽전 한돈 오푼
  •     동대문서 청량리까지 엽전 서돈
  •     보제원서 청량리까지 엽전 한돈

(출전 : 『독립신문』 1899년 5월 2일)

[사료 설명 : 참고로 당시 신문 1장 값은 동전 1푼이었다. 전차 상등과 하등의 가격 차가 크다. 엽전 한돈 오푼은 1전 5푼을 가리킨다].

〔사료 4-3-04〕「전기거에 불을 지르다」

전기거라 하는 것이 대한에 처음 생겨남에 아직도 개명 못된 인민의 안목에 어찌 구경스러운 물건이 아니라고야 하리요. 그러한 고로 전기거 내왕하는 데 구경들 하려고 남녀 노소 상하 없이 다투어 타기도 하고 구경도 하는데, 혹 실족도 하고 혹 실수도 하여 경색이 매양 좋지 못하다더니, 어제께 어떤 아이가 또 죽었다는지라. 오전 9시쯤 되어 전기거가 동편에서 올라오는데 인민이 많이 모여 있다가 전기거가 전동 병문 앞 종로에 당도하거늘 인민이 달려들어 그 전기거를 짓부시며 불을 놓아 다 태우면서 하는 말들이 “전기거에 사람이 많이 상하고 죽고 또 날이 오래 가물고 전폐로 가계가 생겨 물가가 고등하여 인민의 정형이 점점 못살 지역이니 어찌 하면 좋을는지. 정부에서는 이런 민정을 좀 살피지 않은지 밤낮 한다는 사업이 무슨 일들인지 공변될 공(公)자는 간 곳 없고 사사로울 사(私)자만 성행하니 그 정부 믿지 않는 백성들은 어떻게 안보하리요.” 하고 답답한 말들을 한다더라.

(출전 : 『독립신문』 1899년 5월 27일)

서울 전차의 모습(1903)
보신각과 전차
박기종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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