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1) 국내 언론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보도의 전말

다. 오보의 배후

대체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기간 이전 또는 기간 중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는, 삼상 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전시 협조 관계가 복원되어 2차 대전 전후 처리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기대 반 우려 반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동유럽 문제, 이란 문제, 원자력 기술의 공개 및 공유 문제, 일본 점령에서 소련의 참여 확대 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제기되었고, 한국 문제의 해결은 이들 문제보다 덜 중요하게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태평양 성조기』에 실린 랄프 헤인젠의 기사는 미국 국내 독자들을 고려한 것이라기보다는 동북아시아 내지 한국을 고려해서 쓴 기사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그의 기사는 기존 미국의 정책 기조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대한 정책을 이해하고 있는 기자라면, 또 사실 보도를 중시하는 미국 언론의 보도 자세를 감안한다면 당연히 의문을 제기하며 기사 내용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미국의 여론 동향과는 동떨어진 기사가 집필된 의도는 무엇이고, 만약 의도적인 왜곡 기사였다면 왜곡의 주체는 누구일까? 기사의 정확한 출처를 알아 보기 위해서는 랄프 헤인젠이 워싱턴 D.C에서 UP 통신을 통하여 이 기사를 실제로 내보냈는지 확인해야 하지만, UP 통신의 후신인 UPI 통신의 기록관에는 랄프 헤인젠의 송고 기사가 남아 있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기사의 집필자는 랄프 헤인젠일 수도 있고, 『태평양 성조기』 측일 수도 있다. 이 기사가 포함된 『태평양 성조기』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관련 기사는 외신 종합이라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한국 관련 내용만 필자를 밝혀 놓았다. 이 기사는 『태평양 성조기』 편집부 또는 그 신문의 어느 기자가 랄프 헤인젠의 기사를 포함한 삼상 회의 관련 외신 기사들을 짜깁기하여 집필한 것이 된다. 이 과정에서 랄프 헤인젠의 이름이 도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랄프 헤인젠은 1930년대부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던 UP 통신 특파원이었다. 그는 1944년 3월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환하였고, 귀환 후에는 전쟁 전문가로 행세하면서 분석 기사도 집필하였지만, 1) 뉴욕 시 인근 부인회에서 강연이나 하면서 소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의 오랜 특파원 경력으로 보건대 그는 유럽 전문가였으며, 2차 대전 전문가로 불릴 만도 하였지만 동아시아와는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한국 문제에 대한 기사를 집필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날조 전문가’(notorious faker)로 통했으며, ‘상상력으로 벽면 가득 기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

오보 기사의 필자를 아직 확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동아시아에 문외한인 한 특파원이 쓴 정확성과 신뢰도가 떨어지는 기사를 아무런 검증 없이 합동 통신사가 수신하여 국내 신문사에 배포하였고, 국내 신문들 역시 아무런 검증 과정 없이 이 기사를 보도한 셈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분석해야 할 것은 합동 통신의 기사 입수 경로이다.

김동성

합동 통신사는 25일발 워싱턴 모 통신사발로 다른 신문사들에게도 이 기사를 보급하였다고 하는데, 합동 통신사가 이 기사를 보급한 날짜가 며칠인지, 워싱턴의 모 통신사가 어느 통신사인지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 또한 지금 시점에서는 해명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합동 통신이 이 기사를 『태평양 성조기』로부터 취재했다면 합동 통신은 미 육군을 위한 군인 신문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지도 해명되어야 한다.

합동 통신의 전신은 일제 식민지기의 도메이(同盟) 통신이다. 미 군정은 이 통신사를 11월 초에 접수하였고, 국제 통신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였다. 그러나 곧 경영난 때문에 연합 통신과 합병하여 합동 통신이 되었다. 이 기사를 국내에 제공한 합동 통신 주간 김동성(金東成)은 이승만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인물이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공보처장(1948년 8월∼1949년 8월)을 지냈다.

합동 통신사는 이 기사를 외신 기사로 위장했고, 미 군정 보고서는 이 기사의 출처를 『성조기』로 지목하였으며,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기사 내용은 『태평양 성조기』에 그대로 나온다. 하지만 보도 날짜를 비교해 보면 이 기사의 출처는 『태평양 성조기』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해당 기사는 『태평양 성조기』 12월 27일자에 실려 있고, 이 신문은 도쿄(東京)에서 발행되었는데, 당시 『동아 일보』가 조⋅석간을 모두 발행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운송 수단과 출판 기술을 감안한다면 도쿄에서 발행한 신문의 기사를 서울에서 받아 보고, 같은 날짜에 그 기사 가운데 일부를 재편집하여 서울에서 재간행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했겠는가 따져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이 기사는 사전에 도쿄의 『태평양 성조기』 편집실이나 서울의 합동 통신사, 또는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에 확보되어 있다가 같은 날 동시에 보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추리를 뒷받침하게 만드는 것이 앞에서 인용했던 미 군정의 「신탁 통치」라는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오보 기사가 『성조기』에 실린 날짜를 12월 27일로 적었던 반면, 합동 통신사가 이 기사를 배포한 날짜는 그 다음 날인 28일로 적었다. 보고서의 필자가 『태평양 성조기』와 『동아 일보』의 기사를 확인하고 해당 내용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보고서의 필자는 도쿄의 기사가 서울에 전파되기까지는 적어도 하루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사의 출처가 『태평양 성조기』가 아니고 사전에 누군가에 의하여 『태평양 성조기』와 합동 통신사에 배포된 것이라면 그 제공자는 누구이고, 제공 의도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자료와 근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추론은 가능하다. 그 제공자는 최소한 합동 통신을 통하여 한국에 기사를 전파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며, 동시에 『태평양 성조기』에도 같은 기사를 게재할 수 있어야 한다. 합동 통신 주간 김동성이 이승만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나, 이승만이나 김동성이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에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으려면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정보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조직은 미 군정이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밖에 없다. 즉 이 기사의 작성과 배포에는 도쿄의 미 육군 극동군 사령부와 서울의 주한 미군 사령부가 조직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예를 들어 「Press Telegram and Long Beach Sun」 1945년 8월 14일자에 실린 “World War II Cost in Dead, Wounded, and Missing 55,000,000” 참고. 그는 이 기사에서 자신을 UP 통신의 전쟁 분석가(War Analyst)로 소개하였다. http://library.thinkquest.org/C006216/acknowledge.html
2)스티븐슨은 UPI 통신 전직 부사장이자 편집장이었다. UPI 통신은 UP 통신의 후신이다. 왈라스 캐롤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전쟁 기간까지 UP 통신 특파원으로 런던, 파리, 제네바, 마드리드와 모스크바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미국 정부의 전쟁 정보처(Office of War Information)에서 일하다 『뉴욕 타임즈』로 자리를 옮겼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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