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4) 찬⋅반탁 논쟁에 대한 미 군정과 소련의 반응

나. 소련 타스 통신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협상 전말 공개

미 군정과 남한 우익이 반탁 운동의 수혜자였다면 소련과 남한 좌익은 그 피해자였다. 박헌영⋅존스턴 사건은 누가 보아도 미 군정의 여론 공작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반탁 운동의 열기가 남한을 휩쓸고 있는 상태에서 남한의 좌익 세력이 이 문제를 정면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 공산당은 성명을 통하여 존스턴의 왜곡에 항의하였고, 또 박헌영의 해명과 기자단 성명을 통하여 진상을 밝히는 것 외에는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면 대응은 모스크바로부터 나왔다. 1946년부터 소련 외무성 부상 로조프스키의 지시에 따라 스몰렌스키라는 필명으로 한국 문제에 대한 소련 언론 기사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외교관 출신 페투호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소련 정부의 상황 인식과 대응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였다.

소련군 요인들

〔사료 4-1-01〕 소련 정부의 상황 인식과 대응에 관한 페투호프의 기록

“모든 책략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목적을 추구하였다. 조선에서 반동적인 친미 분자들에게 대중성을 보장해 주고, 반대로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좌파 민주 정당 및 조직들을 궁지로 모는 것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정부는 남조선에서 미 군정 통제하에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반동 신문들의 의도적인 보도를 폭로하기 위하여 모스크바 결정의 조선 문제 논의에 관한 진실을 해명할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조선의 통일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기원에서(Петухов В. И. У источиников борьбы за единство и независимость Кореи/. М., 1987)』 с. 44.)

조치는 타스 통신을 통하여 나왔다. 타스 통신은 1월 22일 미 군정이 남한 언론의 반소 선전을 허용했으며,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반대를 고무한다고 비난하는 1월 19일 평양발 급보를 내보냈다. 이 보도는 남한 주둔 미군 사령부의 태도는 미국도 참여한 삼상 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반동 세력의 시위를 고무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라고 덧붙였다. 타스 보도는 김구와 이승만 사이비 정부의 도발 행위는 삼상 회의를 반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내전을 시작하고 소련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공격하였다. 이 보도는 모스크바 발 AP 통신으로 타전되었고, 『뉴욕 타임즈』는 1월 23일자로 이 보도를 자세히 취급하였다.

이 보도는 김구와 이승만의 반탁 운동을 내전의 신호탄이자 소련에 대한 적대 행위로 몰아붙였고, 반탁 운동의 정치적 의도를 삼상 회의 결정을 무효화시키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1월 22일자 타스 통신 보도는 평양발 급보라는 현지 취재 형식을 취함으로써 소련 당국이 직접 미 군정을 비난하고 나서는 형식은 피했지만, 그 내용은 미 군정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타스 통신이 소련 당국의 견해를 반영한 창구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어쨌든 소련이 비난의 형식과 수준을 정치적으로 고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1월 22일자 타스 통신 보도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다. 미국 정부 차원에서는 이 보도에 대하여 아무런 논평을 내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맥아더 장군 대변인이 타스 통신을 비난하고 나섰다. 1월 23일자 동경 발 AP 통신에 의하면 맥아더 장군 대변인이 타스 통신 보도를 “연합군 최고 사령부(SCAP)의 신용을 실추시키려는 명백한 계획이고, 이는 현재의 점령 정책과 점령 통치에 변화를 강요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즉 남한은 하지 중장의 직접 통치 아래에 있지만, 동시에 맥아더 관할하에 있는만큼 하지에 대한 비난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맥아더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라는 논리이다. 이 대변인은 심지어 일본 공산당원을 포함한 모든 반대파에게 맥아더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데 이 보도를 최대한 이용하도록 지시하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1월 22일자 타스 통신 보도가 노련하게 소련 당국의 연루를 피하면서 미 군정을 비난했다면, 맥아더 사령부는 직접 나서서 타스 통신 보도를 일종의 날조이자 맥아더에 대한 음해로 맞받아쳤다. 타스 통신 보도가 미 군정을 겨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맥아더 사령부의 이러한 과잉 반응은 의구심을 자아낸다. 맥아더 사령부가 직접 나서서 강력히 대응함으로써 하지를 원호하고 그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려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탁 통치 파동의 배후에는 미 군정뿐만 아니라 맥아더 사령부도 개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타스 통신이 1월 24일자로 삼상 회의에서 신탁 통치 제안자가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자, 1월 25일 맥아더 사령부는 23일자 AP 통신을 통하여 타스 통신을 비난한 대변인은 맥아더 ‘사령부’의 대변인이기는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대변인은 아니라고 해명하는 옹색한 촌극을 연출했다. 사태가 미⋅소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할 조짐이 보이자 맥아더 사령부는 타스 통신 보도에 대한 비난 행위와 맥아더의 관련을 끊어 내는 식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1월 22일자 타스 통신 보도에 대한 미 군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하지는 이를 ‘근거 없는’ 비난으로 일축하면서 자신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장려한 것이 오해를 받은 것 같다고 반응했다. 그는 이 문제를 상부의 사령부와 의논하지 않았고, 타스 통신은 아마 보고서 전문이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 군정은 이 보도가 기본적으로 사실이 아니며, 하지 장군과 미 군정에 대한 야비한 공격이라고 반응하였다. 미 군정은 남한에서는 기자들의 취재가 자유로운 데 반하여 북한에는 기자들이 접근할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남한 지역의 언론 자유를 부각하였다. 또 타스 통신 보도의 취재원이 소련 대표단일 것이라고 암시함으로써 이 보도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은연중 내비쳤다. 하지만 미 군정은 이 문제가 남과 북의 분할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며 타스 통신의 비난에 대하여 정면 대응을 삼갔다. 미 군정은 이 보도 때문에 긴장했음이 역력했다. 우선 미 군정은 이 기사가 남한 사회에 보도되는 것을 막았다. 하지는 남한의 언론 자유를 강조했지만 이 기사의 보도를 통제함으로써 남한의 언론 자유 역시 구호에 불과함을 행동으로 증명해 주었다.

이 문제에 대한 『뉴욕 타임즈』와 타스 통신의 핑퐁 식 대응 보도는 마치 한 편의 체스 게임을 보는 것 같다. 22일 타스 통신의 미 군정 비난 기사에 대하여 『뉴욕 타임즈』는 앞에서 살펴본 맥아더의 반박 기사를 1면에 실었고, 그 기사에 이어서 하지의 부인 기사를 2면에 실었다. 『뉴욕 타임즈』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같은 날 18면에 ’한국의 두 강대국’이라는 해설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타스 통신의 공격을 현재 서울에서 진행 중인 미⋅소 양군 대표자들 사이의 협상 성공을 위해서나 극동 지역에서의 미⋅소 관계를 위해서, 또 한국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위해서 좋지 않은 징조로 파악했고, 이 공격을 사실무근으로 생각한다고 못박았다. 또 현재 기자들의 교류를 막고 있는 38도선을 개방하여 남한에 러시아 통신원을 파견할 뿐 아니라 북한도 미국 기자를 받아들일 것을 소련에게 요청했다. 이 기사는 분할선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문제를 신속히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결론 맺음으로써 미 군정이 이전부터 주장해 왔던 바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하지가 우려했듯이 22일 타스 통신의 미 군정 비난이 전부는 아니었다. 22일자 타스 통신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보도된 것이 23일이고, 이 기사에 대한 맥아더의 반박과 하지의 부인이 실린 것이 24일이었다. 타스 통신은 모스크바 현지 시간으로 24일 밤에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삼상 회의에서 신탁 통치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었다며 미국 측 제안 내용과 협상 전말을 자세히 공개했다. 타스 통신은 미국 측 제안이 신탁 통치가 수립될 때까지 행정권을 행사할 통일 시정 기구를 양군 사령부가 설치하는 것이었으며, 민주주의적 조선 임시 정부 수립의 시급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 4강대국에 의한 신탁 통치를 실시하되 그 기간도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료 4-4-01〕 타스 통신 기사 전문 ’주소 대리 대사 케넌이 국무 장관에게 1946. 1. 25

다음은 1월 25일자 소련 신문에 발표된 한국 문제에 관한 타스 통신 성명의 전문입니다.

“미군 관할하의 남한에서 간행되는 많은 신문들은 한국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의 미⋅영⋅소 3국 외상 회의의 결정과 관련하여 왜곡된 보도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보도들은 마치 한국의 신탁 통치가 소련에 의하여 제기되고 미국은 반대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 보도를 중지시키고 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타스 통신은 다음과 같이 해명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한국 문제는 미국 대표의 주도하에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토론에 붙여졌는데, 미국은 자기 측 초안을 한국에 관한 결정으로 제시하였다.

이 제안에서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의 가장 시급한 목표는 통화, 무역, 수송 등 한국의 국익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공동 보조를 취할 양군 사령부 간의 통일된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이와 함께 동 제안은 한국인들을 가능한 통일된 행정 체제의 관리로서, 또 양군 사령부의 자문단이나 고문단으로 끌어들일 것을 명기하였다. 또한 동 제안에는 통일된 행정은 광범한 기초 위에서 한국의 비군사적 행정 감독을 향한 과도적인 단계로 설정되어 독립된 한국 정부의 설립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4대국에 의한 신탁 통치는 한국 독립의 실현을 위한 가장 적절한 기구가 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함께 동 제안은 신탁 통치에 대한 합의하에 한국에서의 통일된 행정 체계의 설치 문제를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4대 이해 관계국이 토의할 것도 제안하고 있다.

미국 측 초안은 더 나아가 이러한 협정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국제 연합과 한국민을 대신하여 일하게 될(미⋅영⋅중⋅소에 의한) 통치 기구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통치 기구는 독립된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효과적인 한국 통치를 위하여 필요한 행정⋅입법 및 사법권을 행사할 것이다. 이 통치 기구는 그 권한과 기능을 통치 기구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의 대표들로 구성될 ‘고위 책임자 및 집행부 협의회(High Commissioner and Executive Council)’를 통하여 행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제안은 동 협의회가 빠른 시일 내에 한국민의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진보를 이룩하여 민선 입법 기구 및 필요한 사법 체계를 수립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5년 기한 내에 독립된 한국 정부를 수립함을 목적으로 하며, 이 기간은 필요하다면 4대국 대표로 구성될 통치 기구의 의결에 따라 5년 이내의 범위에서 연장될 수 있다.

미국의 제안을 접수한 후 소련 대표는 삼국 외상 회의에 한국에 관한 소련 측 제안을 제출하였다. 소련 측 제안을 검토한 미국 대표단은 자신들의 제안을 철회하고 별다른 수정 없이 소련 측 제안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영국 대표단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 결과 소련 측 제안이 한국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기초가 된 것이다.

한국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은 1945년 12월 28일 발표되었는데, 기본적인 몇 가지 점에서 미국 측 원안과 차이를 보인다.

첫째, 미국 측 제안은 신탁 통치가 수립될 때까지 한국의 행정권을 행사하게 될 양군 사령부에 의한 통일 행정 기구를 한국 내에 설치하는 것을 첫 번째 단계로 구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양군 사령부의 행정 기구들에 대한 한국민의 참여를 오직 관리자나 자문 혹은 고문 자격으로 한정하고 있다. 미국 측 제안에는 이 기간 내에 한국의 국민 정부 구성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삼상 회의 결정서에 채택된 소련의 제안에는 남⋅북한에 공히 영향을 미치는, 시급한 행정 및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들이 명기되어 있으며,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 한국에서 진행 중인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들 간의 회담을 통하여 이미 이 논의가 시작된 셈이다. 이와 함께 동 결정은, 한국민들의 국민적 요구를 집약하고 일본에 의한 기나긴 한국 통치의 잔재를 청산할 민주주의적 한국 임시 정부 구성의 긴급성을 인정하였다.

둘째, 미국의 제안은 한국에서의 신탁 통치를 위하여 4대국 대표로 구성되는 ‘고위 책임자 및 집행부 협의회’를 통하여 그 권한과 기능을 수행할(미⋅영⋅중⋅소) 4대 세력이 참여하는 통치 기구를 창설하자는 것이다. 미국 측 제안에 따르면 이 통치 기구는 한국에서의 탁치 기간 중 행정, 입법 및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바, 미국 안은 이 기간 중 한국의 국민 정부 창설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제안은 소련 측 안에 따른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인다. 동 결정은 한국의 국민 정부 수립을 결코 지연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미⋅소 양국 대표를 대신할 한국 임시 정부의 구성에 협조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미소 공동 위원회 구성을 결정하고 있으며, 동 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의 자문을 받아 한국 정부의 수립을 촉진시키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내의 신탁 통치는 한국민의 국민적 이익을 보증할 한국 임시 정부 및 그 기관들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셋째, 미국 측 제안은 한국의 신탁 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탁치 기간의 5년 연장이 가능한 것으로 하고 있다. 소련 측 안에 따른 삼상 회의 결정은 신탁 통치 기간을 5년으로 못박고 있다. 그리하여 신탁 통치 기간의 연장은 배제되었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한 한국 신문 보도들은 사실을 왜곡하고 소련의 진정한 입장을 곡해한 것이다. 분명히 한국 신문들은 잘못되고 파렴치한 정보의 희생물이 되고 만 것이다.”

[케넌]

(출처: 김국태 역, 『해방 3년과 미국 I』, 돌베개, 1984, 201∼203쪽)

『뉴욕 타임즈』는 1월 25일자로 24일자 타스 통신 보도를 내보냈다. 『뉴욕 타임즈』는 24일자 런던 발 UP 통신으로 9면에 이 기사를 내보냈고, 아무런 논평 없이 간략한 사실 보도로 처리했다. 또 23일자 맥아더의 타스 통신 비난 기사는 맥아더와 무관하다는 해명성 보도가 이 기사를 바로 이었으며, 한국에서 좌우 파쟁이 격화하고 있다는 존스턴의 24일자 기사가 그 뒤를 이었다. 마땅히 다루었어야 할 한국 내 반응을 다루지 못한 것은 24일자 타스 통신 보도 역시 남한에서는 미 군정 통제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즈』의 이러한 태도는 22일자 타스 통신 보도에 대하여 맥아더의 반박과 하지의 부인을 1, 2면에 내보냈던 것과 비교하면 조금은 기세가 꺾인 것이다.

타스 통신과 『뉴욕 타임즈』 쌍방의 보도들은 각각 하루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당시 소련 정부는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주로 『뉴욕 타임즈』 보도를 통하여 확인했는데, 『뉴욕 타임즈』 논조를 예의 주시하던 소련 정부는 22일자 타스 통신 보도에 대한 맥아더와 하지의 반응을 보고 삼상 회의 협상 과정 공개라는 초강수로 반격하였다. 22일자 보도가 평양발 급보 형식을 취한 둘러치기였다면 24일자 보도는 소련 정부가 전면에 나서 직격탄을 날린 셈이었다. 맥아더와 하지가 사실을 부인한다면 이 사안을 외교 문제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임과 아울러 남한에서 반탁 선전의 근거를 없애 버린 결정타였다. 24일자 타스 통신 보도는 막후 협상 내용을 당사국의 사전 양해 없이 공개했다는 점에서 외교 관행에 어긋나는 대단히 예외적인 행동으로, 양국의 외교 관계를 손상시킬 수도 있었다. 소련의 반격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남한에서 미 군정의 언론 통제로 타스 통신 보도들이 공개되지 않자 미⋅소 양군 대표자 회의 참석차 서울에 와 있던 소련 대표 스티코프(Terentyi Shtykov)는 26일 기자 회견을 자청해서, 24일자 타스 통신 보도 전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스티코프가 서울에 온 뒤 처음으로 갖는 기자 회견이었다.

앞에서 미⋅소 양측의 언론 보도를 통한 공방을 체스 게임에 비유했지만 이번 게임은 소련의 완승으로 끝났다. 타스 통신을 통한 소련의 공격은 하지와 맥아더를 궁지에 빠뜨렸다. 만약 사태가 확대된다면 하지와 맥아더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이 공방에서 주목할 것은 미국 측 당국자들의 반응이다.

하지와 스티코프

먼저 미국 정부는 타스 통신 보도들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공개적 대응은 애치슨이 타스 통신 보도가 사실임을 확인해 준 것이 유일했고, 이때에도 10년의 신탁 통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5년의 기간이 만료하면 경우에 따라 이 문제를 재고할 수도 있다는 뜻’이라는 궁색한 변명조였다. 미국 정부가 아무런 항의 표시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미 군정이 반탁⋅반소 선전을 허용하고, 반탁 운동을 고무했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타스 통신 보도들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었다. 또 미국 정부는 하지와 미 군정의 공작 차원의 활동을 잘 몰랐기 때문에 대응하고 싶어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1월 23일 스탈린(Joseph Stalin)과 주소 미국 대사 해리만(Averell Harriman)의 면담 내용은 이러한 추리를 뒷받침한다. 이 자리에는 소련 외무 인민 위원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도 배석했다. 이 만남은 해리만이 이임 인사차 스탈린을 예방(禮訪)하는 자리였지만, 스탈린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항의조로 남한의 반탁 운동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스탈린은 한국에서 온 전문을 해리만에게 읽어 주었는데, 그 내용은 현지 미국 대표들이 신탁 통치 결정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소련만이 굳이 신탁 통치를 고집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한국 신문에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러치(Archer L. Lerch) 군정 장관이 혼란의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러치의 정치적 성향과 재한 시 활동을 보면 소련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소 공위 소련 측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은 러치를 가리켜 ‘전형적인 미국 파시즘의 대표자’라고 평했지만, 미 군정 내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관리였던 번스(Arthur C. Bunce)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국무부에 러치와 같은 강경한 극우 성향 관리들을 적절히 제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치는 남한 정치에 관한 한 우익에게 모든 책임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가까웠다.

해리만 주소 미 대사

스탈린과 해리만의 대화에서 보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스탈린이 혼란의 장본인으로 현지 군정 장관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는 점과, 해리만이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완곡 어법을 사용했지만 한국 주재 미국 대표단의 소행이 미국 정부 차원의 대변이 아니라고 반응했다는 점이다. 스탈린이 미국 정부를 연루시키지 않은 채 반탁 선동의 배후로 러치를 지목했다면, 해리만 역시 현지 대표의 의견은 정부 의견이 아니라고 답변하여 미국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해리만은 남한 사태의 전개를 잘 몰랐거나, 이 문제로 미국 정부가 외교적 책임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해리만의 답변에 이어서 스탈린은 그렇다면 소련 정부는 소련만 유일하게 신탁 통치를 지지한다는 발표를 부인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대답했다. 노회한 스탈린은 해리만으로부터 24일자 타스 통신 보도에 대한 사전 양해를 얻어 낸 셈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해리만은 스탈린과의 대화 내용을 모스크바를 떠난 뒤 뉴델리에서 군 계통으로 맥아더를 경유해서 국무 장관에게 보냈다. 해리만은 맥아더도 이 전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러치 군정 장관

의외의 사실은 맥아더 사령부의 반응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타스 통신 22일자 보도에 대해서는 강공으로 허세를 부리다가, 24일자 보도에 대해서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수세적 태도를 보였다. 관련자들의 태도와 정황으로 보건대 맥아더 사령부도 신탁 통치 파동에 어떤 식으로든지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러한 태도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맥아더 사령부는 남한의 신탁 통치 파동을 어떻게 보았는지, 또는 파동에 어느 정도 연루되었는지는 앞으로 분석해야 할 과제이다.

하지와 미 군정은 이 모든 소동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소련 정부까지 나서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타스 통신의 첫 보도부터 미 군정은 긴장하는 기운이 역력했다. 하지의 발언에 나타나듯이 첫 보도가 나가자 미 군정은 이 문제를 상부와 연결시키지 않은 채 현지 차원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는 처음에는 사실무근을 주장했으나, 타스 통신의 두 번째 보도가 나오자 공개적인 대응을 포기하였다. 대신 그는 미친 듯이 날뛰면서 국무부와 육군부에 타스 통신 보도 내용의 진위를 묻는 전문을 타전했다. 본국으로부터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는 답변을 듣자, 하지는 타스 통신 보도로 미 군정이 입은 정치적 손실은 국무부가 자신에게 제때에 정보를 주지 않고, 점령 이래 자신의 신탁 통치 반대 건의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며 사태의 책임을 국무부에 떠넘겼다. 하지는 이 전문을 합동 참모 본부를 경유하여 국무부에 보냈는데, 이런 행동으로 보건대 이 전문은 일종의 해명성 발언이었다.

또 하지는 1월 28일 맥아더에게 자기가 물러나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양’이 되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하지는 자기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은폐하고 체면을 살리기 위한 연막에 가까웠고, 사태의 책임을 언론 보도와 국무부로 떠넘겼던 것처럼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 전문에 대하여 국무부는 삼상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에게 하지의 요청을 그때 그때 전달했으며, 하지는 삼상 회의에 임하는 미국 입장을 사전에 숙지했다며 하지의 불평에 대하여 오히려 불쾌감을 표시하였다. 당시 국무부는 주한 미군 사령부를 맥아더 장군 관할로부터 독립시켜 국무부와 직접 연결하는 방안을 모색하였고, 하지에게 보낼 고위 정치 고문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1) 국무부는 하지 때문에 소련으로부터 외교적 망신을 톡톡히 당한 터라 그러한 생각은 한층 절실했을 것이다.

타스 통신 보도로 미국은 심각한 정치적, 도덕적 타격을 입었다. 반탁 운동이 몰고 왔던 반공⋅반소 여론의 조성, 우익의 정치적 입지 강화라는 정치적 효과는 그 근거가 사라지게 되었다. 미 군정은 신탁 통치 파동이 시작되면서 남한에서 잠시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나 타스 통신 보도로 그 지위마저 도로 상실했다. 당시 미 군정이 실시했던 여론 조사는 미국의 명백한 표리부동이 드러남으로써 그 위신이 바닥에 떨어졌음을 잘 보여 준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이후 미⋅소 대표가 미소 공동 위원회 협상 테이블에 앉기까지 미국과 소련은 총성 없는 외교 전쟁을 벌였고, 한국인들 상대로는 신탁 통치 파동의 발단에서 귀결까지를 두고 물밑에서 숨가쁜 언론 공작과 여론전을 펼쳤다.

1)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29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