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4. 형정풍속도의 내용과 특징1) 오형(五刑)의 내용과 특징

다. 사형

사형(死刑)은 오형 가운데 극형(極刑)으로 강도, 살인, 반역범 등에 부과하는 최고형이며, 죗값을 목숨으로 대신하는 생명형이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사형 집행은 3차례 심리한 결과를 왕에게 보고한 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시행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 사형 제도가 유지되지만,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이 정지되어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여전히 사형 제도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거운 사회 문제 중 하나이지만, 예전에 비해 범죄자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조선 시대 사형의 종류는 죄의 경중에 따라 전기지체(全其肢體)와 신수이처(身首異處)로 구분된다. 전기지체는 글자 그대로 몸통과 사지가 온전히 처벌되는 효수형(梟首刑)을 이르며, 신수이처는 몸과 머리가 떨어져 다른 곳에 처하는 참수형(斬首刑)을 말한다. 죄의 경중에 따라 신체 훼손 여부를 달리함으로써 다시 한 번 죽음의 등급을 나누는 것이다. 1878년 프랑스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Felix Clair Ridel)이 포도청의 감옥 생활을 수기로 남긴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에 효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료 4-1-01〕

그 가련한 자가 붙들려 나와 시체방으로 끌려 들어가면, 거기서 옥졸이 죄수의 목을 맨 다음 밖으로 나와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옥졸 4명이 마치 닻을 끌어올리듯 아무런 감정도 없이 올가미 줄을 잡아당긴다. 줄을 팽팽하게 당긴 다음에는 묵직한 나무토막을 가져와 줄을 묶어 놓는다. 이렇게 하면 형 집행이 모두 끝난 것이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살림, 2008, 143쪽.)

이처럼 효수형이 감옥 내 특별한 처형장에서 사무적이고 능숙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그의 목격담에 따르면 형이 집행되고 나면 감옥에 남은 죄수들은 ‘밥알 한 톨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 공황에 빠졌고, 죽은 죄수의 귀신이 붙을까봐 밖을 향해 연달아 침을 뱉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도19〉 김윤보, 교살(絞殺), 『형정도첩』

효수형 관련 그림은 김윤보의 〈도8〉 〈교형(絞殺)〉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그림은 목줄에 감겨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사형수를 집행관이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효수 방법은 사형수의 목에 감긴 밧줄을 교수대 상단에 걸린 고리에 끼우고 바닥으로부터 끌어올린 다음 남은 줄을 기둥에 감아 묶어 고정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림 속 인물 가운데 뒤쪽에 벙거지를 쓴 포졸은 시신의 모습을 외면하고 있지만, 전립을 쓴 포교 2명은 몹시 차갑고 무감각한 표정으로 사형수를 바라보고 있다. 김윤보 자신이 사형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장면을 그리는 자신도 사형수의 참혹한 얼굴을 차마 그릴 수 없어 뒷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한편 참수형은 강상죄(綱常罪)1)와 존엄자(왕)에 대한 난언(亂言) 등 체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에 대한 처벌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물론 신체 훼손을 통한 고통도 가중하였고, 훼손된 시신을 효수하여 망자를 능멸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을 방문했던 A. H.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Landor)는 살벌한 형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료 4-1-02〕

달구지2)가 언덕 바로 아래의 평지에 멈추고 (중략) 사형 집행인에게 인계되었다.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들은 등 뒤로 팔을 결박당하고 상투를 긴 줄에 묶인 채 얼굴을 땅 위에 떨구었다. 그들은 다시 옮겨지기 전까지 작은 발판 위에 가슴을 대고 땅 위에 엎드려 있었다. 죄인들의 자리 배치가 끝나자 사형 집행인은 그들의 머리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날이 무딘 칼로 계속해서 내리쳤다.

(A. H. 새비지 랜도어 지음, 신복룡⋅장우영 역주,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218~ 219쪽.)

그가 묘사한 사형장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김윤보의 〈역적참항(逆賊斬項)〉과 김준근의 〈참형하는모양〉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살인⋅강도에 대한 참형은 포도청사 앞에서 집행되기도 하였는데, 〈도20〉과 같이 길 가운데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두른 임시 막사에서 포도대장이 처형을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당 좌우에는 전립과 철릭 복장의 포교들이 도열해 있어 형장의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효수대 옆 말단에는 벙거지를 쓴 포졸이 오른손으로는 주장(朱杖)을 짚고 왼손에는 사형수의 상투 끝에 묶어 고리에 끼운 줄을 잡고 있어, 곧 잘려나갈 목을 매달 준비를 하고 있다. 〈도20〉과 같이 참수는 특별한 형틀 없이 초라한 맨바닥에서 거행되었는데, 〈도21〉처럼 바닥에 거적을 깔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사형수의 모습은 그림처럼 “작은 발판3) 위에 가슴을 댄 채 팔은 등 뒤로 결박당했고, 상투는 긴 줄에 묶여 얼굴을 땅 위에 떨군” 모습이었다. 또한 죄수의 귀를 뚫어 관이전(貫耳箭)이라는 화살 2개를 꽂아 목뒤로 교차하고 있는데, 김준근은 관이전을 허술하게 묘사한 반면 김윤보는 귀 뚫림, 화살의 교차 모습 등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망나니라고 부르는 회자수(劊子手)는 두건 형태의 모자4)를 쓰고 있어 다른 관리들과는 복장이 확연히 구분된다. 그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광기어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김화진의 『한국의 풍토와 인물』에 따르면 회자수는 주로 사형수 가운데 선발되는데, 집행일에는 그에게 술과 밥을 마음껏 먹게 한 데서 “한밥 먹는다.”는 속담이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사약(賜藥)은 사형의 일종이지만, 앞서 본 교수⋅참수형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명예형이었다. 사약은 한자뜻 그대로 ‘하사하는 (독)약’인데 『예기(禮記)』의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욕되게 할 수 없다(士可殺不可辱)”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사약은 왕실의 종친이나 관리 등에게 주로 언도되었다. 〈도23〉은 사약의 집행 과정을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그림이다. 사약 집행이 방 안에서 거행되고 있는데, 드라마와 영화처럼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진행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림 속 죄인은 사모와 각대 등 관복을 착용해 의관을 정제하였고, 단정히 무릎을 꿇은 채 담담히 사약을 들이키는 모습이다.

방안에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또는 형방승지(刑房承旨)로 보이는 집행관이 형 집행을 주도하고 있다. 뒤편에는 전립과 도포 차림의 의관이 형 집행 이후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마당에는 사약을 운반했던 의금부 나장(羅將) 2명이 대령해 있는 모습이다.

1)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윤리를 범한 죄
2)인용자 주 : 檻車
3)인용자 주 : 목침
4)회건(劊巾)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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